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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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환 목사(시카고기쁨의교회 담임)

현대인들에게 죽음은 관념이다. 특히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에 사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과거에는 사람이 죽는 걸 보는 일이 흔했다. 심지어 버려진 시신을 보는 일이 흔했던 시절이 있었다. 오늘날 한국이나 미국 같은 나라에 사는 이들은 자기 가족의 경우를 제외하면 죽음을 보는 일이 거의 없다. 심지어 가족도 병원에서 숨을 거두면 곧 장례식장으로 옮겨지고 거기서 얼굴에 화장까지 잘 해서 유가족 앞에 나타난다. 죽음은 우리 일상에서 안 보이는 곳으로 치워지고 마치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존재한다.

그러던 우리가 요즘 죽음의 실재를 매일 경험하고 있다. 누가 죽었다는 소식이 매일 들려온다. 죽음이 우리 가까이 있다. 뉴욕의 지인은 요즘 매일 부고를 듣는다고 탄식하며 말한다. 미시간 주의 어느 병원에서 영안실이 부족해 시신들을 방안에 보관하고 있다는 기사가 들린다. 이제야 사람들이 죽음을 관념이 아니라 실재로 느끼고 있다. 그것이 내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불안을 실제로 느끼며 마스크를 쓰고 손을 씻는다.

죽음은 실재인가? 그렇다면 부활도 실재다. 아니, 그리스도인에게 부활은 죽음보다 더 선명하고 강력한 실재다. 초대교회 제자들에게 부활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지는 것이었다. 종교나 철학이나 이론이 아니었다. 삶이었고 실체였고 능력이었다. 하여, 그들은 죽음을 향해 비웃음을 날리며 부활의 증인으로 살았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히11:38).

문제는 우리다. 우리는 어디 가야 부활의 증거를 볼 수 있을까?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 예루살렘에 가면 예수님의 무덤이 있던 곳이라고 알려진 성묘교회가 있다. 매일 수많은 순례자들과 관광객들이 찾아와 그 곳에서 무릎 꿇고 기도를 하거나 입을 맞춘다. 안타깝지만 거기에도 부활의 주님은  계시지 않다. 무덤을 찾은 여자들에게 천사는 그분이 가신 곳을 알렸다. “갈릴리로 가시나니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막16:7). 예수께서는 아픈 자, 가난한 자, 절망한 자들이 있는 그 변두리, 갈릴리로 다시 가신다.

세월호 희생자인 단원고 이창현 군의 어머니 최선화 집사가 3년 전 세월호 추모 음악회에서 올린 기도문의 일부다.  “창조주이시며 전능자라고 불리는 당신께 기도드리는 건 쉽지 않습니다. 3년 전 우리 아이들의 살려달라는 마지막 기도를 외면했었으니까요. 당신께 등 돌리고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디를 가든 당신이 계시더군요. 더 이상 울 힘조차 없어 그저 멍하니 앉아 바다만 바라보던 팽목항에도,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하늘을 보며 잠을 청해야 했던 국회에도, 내리쬐는 땡볕을 피할 그늘 하나 찾기 어려웠던 광화문에도, 하수구 냄새에 시달려야 했던 청운동 사무소에도, 침몰 지점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동거차도에도, 그리고 병든 몸을 이끌고 세월호가 누워있는 목포 신항에도 당신은 계셨습니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몰랐던 분들이 눈물 가득 고인 눈으로 다가와서 안아주시며 같이 울어주시는 따뜻함에서 당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식 잃은 이 어머니가 예수를 만난 그 자리는 분명 갈릴리였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우는 자와 함께하는 이들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셨다. 부활을 보려면 그곳으로 가야 한다. 실패한 사람들 곁으로, 직장을 잃고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어느 이민자의 가정으로, 마스크를 써야 하지만 강도로 오해 받을까 두려워 쓰기 주저한다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 곁으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