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감사하는 삶”

515

 

문장선 목사 

 

해마다 11월이 되면 미국에서는 감사절의 열기에 젖어든다. 그러나 그 감도는 1620년대에 청교도들이 미 대륙에 건너와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지은 첫 농사를 추수하여 하나님께 감사제를 드리고 축제를 가졌던 감격에 비해 세월이 흐르면서 너무나 변질된 현실에서 체감하는 온도의 차이를 뒤늦게 이민 온자들을 민망하게 만든다.

감사하는 삶과 감사하지 않는 삶은 종교인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단순한 이분법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목적과 가치관의 문제라고 본다. 이 계절에 필자는 이민 초기에 있었던 일중에 잊히지 않고 떠오르는 말이 생각난다. 힘든 이민의 삶을 살면서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며 감사할 뿐이다”고 말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똑 같이 힘든 이민생활에서 어떤 이는 “자신은 신께 감사할 것이 전혀 없다”고 말하며 얼굴이 굳어지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두 삶의 거리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성서속의 몇 인물을 통해 살펴보려한다. B.C. 1,100년경 사사시대에 시어머니를 따라 이스라엘로 귀화한 모압여인 룻이라는 미망인과, B.C. 600년대의 하박국이라는 선지자와, 그리고 신약시대에 예수께서 베푸신 비유 속에 나오는 한 부자의 삶을 조명해 본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나타나는 부자의 가치관은 물질에 있었고, 그의 삶의 목적은 육을 위한 인생을 즐기는 쾌락에 있었기에 감사하는 삶 자체가 없었다. 그러나 룻이라는 이방 여인은 남편마저 잃고 시어머니를 따라 빈손으로 귀화하여 시모를 모시면서 밭에 나가 이삭을 주워 연명하는 처지였으나 그녀에게는 삶의 목적과 가치관이 있었고, 하나님을 찾음으로 영적 기쁨이 있었기에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다고 본다.

성경에서 감사하는 삶을 잘 보여준 다른 한 분은 하박국이라는 선지자로, B.C. 600년경 여호야김왕 때 인물로 추정되는데 그가 활동하고 예언했던 당시 유다 왕국은 불의와 부정과 패역이 난무하였고 위정자들은 불의와 부정과 착취를 일삼았고 국민들도 종교와 도덕이 극심하게 타락하였을 때였으나, 하박국 선지자는 감사의 삶을 그의 기도와 찬양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하박국의 감사의 삶은 풍요 속에서가 아니라, 물질을 초월하여  산 삶을 보여주었는데, 그는 그의 기도에서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감사의 마음을 담아 찬양하고 있다.

사람들은 많이 가졌을 때 감사의 삶을 살 수 있겠다고 말하나, 많은 사람들은 더 많이 가져도 그 것을 자신을 즐기기 위해 쓰려할 뿐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으려 한다. 그 이유는 삶의 목적이 향락에 있고 삶의 가치를 물질에 두기 때문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고 하셨는데, 우리도 하박국선지와 같이 극한 악 조건에 처할지라도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을 때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며, 나가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삶은 창조주로부터 신령한 은혜와 기쁨의 순환과 생명의 에너지를 더 풍요롭게 공급받게 될 것이다.([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