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구월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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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후(TV탤런트/네이퍼빌)

 

하늘에 제사를 드린다는것은 고대 때 부터 내려온 습속이다. 기록에 투철했던 유태인이나 철학에 뛰어났던 고대그리스인들 보다도 훨씬전부터 가시덤불에 걸려있는 양을 제물로 삼았던 흔적은 있다. 사람이 죽을(?) 병에 들었을때나, 나라가 망할징조를 보이고있을때 누가 제일먼저 현명한 분별을 할 수 있을까?  요즘에는 그와같은 현상을 본능적으로 알아챈 의원이나 선지자들대신 시시각각 들이닥치는 카카오톡정보가 대신하고 있다고해도 지나친말이 아니다.  “황제는 쟁신칠인(諍臣七人), 제후는 쟁신오인, 대부는 쟁신삼인, 아비에게도 쟁자(諍子)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공자의 가르침이라도 일찌감치 받았을까? 누가무엇을 했다는 음모론에서부터 누구누구는 이랬는데 누구누구는 저랬는데 하면서 그모든 허물이며 거짓들을, 독수리발톱(爪)과 호랑이잇발(牙)처럼 감추면서 대놓고 위선을 떨고있는 작태까지 하나씩 하나씩 차곡차곡 사초에 기록하듯 쌓아가고 있는것이 다르다면 다르다고 할까?  그 죄질과 죄의 분량이 하도 많아서 계수조차 하기 어려울때 사람은 어디까지 셀수있고 어디까지 참을 수 있을까? 아니 참을 수는 정녕, 있는것인가? 기원전 7세기에서 6세기 초, 분열왕국시대를 살았던 이스라엘의 하박국(Habakkuk)은 “여호와여 내가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때까지이리까 내가 강포로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않으시나이다”(합1장1절),!이렇게 부르짖어 묻고 있다. 물론 여러갈래의 신학적인 토론가운데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응답은 그 시기와 장소가 다를 수 있다는 주장을 생각하면서 하느님의 설계를 생각해 보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 이유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좋다는것은 무슨뜻인가? 영어로 “Good”이라는 단어의 뜻은 수백가지를 포함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안에 “사랑”이라는 잣대도 들어 있을 수 있다. 사랑은 누구에게나 무엇에게나 베풀어져야할 잣대이기 때문이다. 이 잣대가 이지러질수는 없다. 시간과 장소를 초월한 광막한 공간에도 존재해야 할 눈금이 아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독생자예수를 대신 죽여야만 지켜질 수 있었던 그 치열한 눈금이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된것이다. 우리는 분명 면도날같은 작두에 올라탄 무당의 형국을 하고있다. 표현이 너무 거칠기는하지만 작두의 올라탄 무당이 발을 베어 죽었다는 소문은 아직 듣지 못했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가를 가늠 할수있는것 보다 더 급한 진실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앞날이라는 것이다. “유황불과 소금기둥”의 전설,”민족들이 불탈것으로 수고하는것과 나라들이 헛된일로 피곤하게 되는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 아니냐”(합2장13절)라는 경고의 한가운데에 내 던저져 있는 우리나라 일지라도, 이 사랑이라는 잣대에는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묵시는 정한때가 있나니 그 종말은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2장3절)”!! 하늘을 향해 제사를 지내며 온갖 미사려구와 칭송의 제물을 바치면서도 그동안 정성을 드려왔던 경박한 우리들, 우리나라!!! 정말로, 그 때가 되었다. 이제 새삼스러울것도 없다. 새로이 정성드려 합장기도하는 9월이 되었으면 정말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