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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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봉(시카고한미상록회장)

 

평화는 숨 쉬는 모든 사람들의 소망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짧은 지식으로 살펴보면 인류역사기 시작된 이후 전쟁이 없는 시대는 찾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에덴동산에서도 뱀은 화와를 도탄에 빠뜨렸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였다. 하느님도 세상평화를 지속시키지 못하셨다. 그 이유가 평화는 구속이 아니라 자유이고 자율적 결과라야 진정한 평화라 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다스리고 다스림을 받는다는 그 자체가 경쟁이고 지배와 피지배의 갈등의 요소로 평화를 저해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개가 사람을 지배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소유하고 태어나는 것 같다. 그 표현이 머리가 되기를 원한다. 머리가 지체(肢體)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 욕망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감투욕이다. 이 감투욕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교회란 범주 안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거의 모든 신도들이 사역직분을 감투로 생각한다. 사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교회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전쟁터에 나가는 셈이다. 감투(敢鬪)란 전쟁을 통하여 쟁취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감투를 소유하려는 삶속에 평화가 공존하겠는가!
이런 현상을 확대해서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정말 역겨워서 피하고 싶은 사건이 참으로 많이 발생한다. 정작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사람은 자기 냄새에 도취되어 스스로는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행여 자기냄새를 느낀다 해도 합리화하여 자기 향기라 주장 한다.
사람들은 좋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 과정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다. 그런데 좋은 과정을 생략한 결과는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함은 철칙이고 진리이다. 하느님도 이루시지 못한 세상평화는 하느님께서 사람의 인권을 존중하시어 못된 사람까지 그 권리를 구속치 않으신 결과이다. 이처럼 중요한 이웃(독자)의 인권을 나는 이런 몇 줄의 편견으로 침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참 조심스럽다. 하지만 개인의 욕망으로 집단이 우롱당하고 동포사회가 분열되고 국민이 편견으로 날을 세우는 참상을 외면하면 유유상종(類類相從)의 우를 범하여 자신이 그 속에 빠지는 일이라 스스로를 정리해 보곤 한다.
나는 두 달여 전에 북 핵 폐기 천만인 서명운동 본부란 미명(美名)으로 새로운 한국을 위한 국민운동 시카고 지부를 설립하겠다는 취지의 사람들을 접견한일이 있었다. 그런데 북 핵에 관한 한, 두 달이란 시간은 엄청나게 행동의 가치를 바꾸어 놓아 당시의 생각이나 계획을 휴지화하고 말았다. 지난 9월9일 북한은 UN에서 채택한 22차례의 성명과 각종 제재를 외면하고 5차 핵실험이란 결과를 저질러 놓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에 부딪힌 나는 괴테가 말한 “행동하는 사람은 언제나 비양심적이다”란 말이 생각났다. 물론 나도 사람이기에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고 완전한 양심으로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여기에는 내 자신이 관조(觀照)에 들지 못한 이유가 있다. 그래서 내 판단은 한 쪽만 선택하게 되어 기울게 마련이다. 우리가 이러한 현상을 행동하지만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는 있어야 한다. 역지사지,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란 격언은 인격 도야(陶冶)의 수단이고 우리의 문화이다. 그런데 서경석씨란 목사는 처음 시카고에 와서 접견했던 20여 명 중 한사람만을 통해서 “새로운 한국을 위한 국민운동” 시카고 지부를 발족한 것이다. 처음 내가 소개하고 동원했던 사람 중 월터 손 씨 만을 통해 구성되었고 심지어 나도 배재되었었다. 행사 이틀 전에 연락을 받았을 뿐이다. 고문 명단에 내 이름이 포함 된 것도 나의 의사와 상관없는 그들의 일방적 행위였다. 처음 그들이 시카고에 왔을 때, 젊은 일꾼이라고 내가 추천한 시카고 거주 각도 도민회 향우회장들에게 내가 부끄러울 정도로 그들도 외면당했다. 그 대신 목사님과 신부님이 14명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 중 이미 은퇴한 분이 있는가하면 목회를 하시지 않는 분이나 하느님을 부끄럽게 하던 사람은 없었든가 분별이 어려운 사람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새로운 교회 정화운동부터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일어날 정도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런 행위를 하는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