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흐르는 세월 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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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원삼(전 주립병원 정신과의사/시카고)

둘째네는 지금 어디 살고 있니 ?”  올해 아흔 살이 되는 맡 형님은 작년에 작고한 바로 밑 동생이자 나의 손위인 작은 형님의 근황을 알고싶어 한다. 나는 웅장한 죠지 워싱톤 브릿지 구조물에 사용됐을 법한 철근과 콩크리트의 양을 상상으로 어림하며, “작년에 돌아갔습니다. 위암 수술 받은 후 곧 세상 떴서요.” 한밤중 뉴저지주 포트 리에 도착 맡 형님 내외분이 살고있는 허드슨 강변 맞은편으로 북쪽 만하탄과 죠지 워싱톤 교량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거의 환상적인 십육층 콘도미니움의 위치를 경탄하는 중이다. 잠시후 맡 형님은 조금 전 질문을 되풀이 한다.  “원강이네는 잘 있니 ?!”  “지금 어데서 살고 있니 ?” 큰 형수님이 세 번째 새로 준비한 차를 따르는 동안 맡 형님은 돌아간 작은 형님의 소식을 여섯번째 묻는다.

아이쩍부터 명석한 두뇌를 인정받는 일가의 자랑이였던 맡 형님. 병리학자(pathologist), 임상의로서 연구활동 통하여 크고 작은 논문을 수없이 발표하던 맡 형님의 기억능력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근처 업스테이트 뉴욕(upstate New York)에 살고있는 큰아들 손녀딸의 이름과 대학 졸업식 일자를 상기시키면, “오, 유나가 발쎄 대학을 졸업한대..” 기쁜 듯이 웃음을 짓는다.  이윽고, “긴데 유나가 누군가아?”

함께 막바지 근처로 나이를 먹어가는 친구들 중에는, ‘기억력이 떨어지고 잊고싶은 사건들이 가물가물 사라져 가버리는 것도 그럴 듯하다고’ 주장한다. “잊고싶은 일들이 애를 쓰지 않고도 사라진다는 말씀이지…” 스스로에게 어줍쟎은 위문편지를 쓰기도 한다. 흐르는 세월따라 안이비설신 오관의 기능이 떨어지는 생리학적 변화를 어찌할 것인가!

방금 느끼고 경험한 사실을 입력하는 해마(hippocampus)와 기억을 잠시 보관하는 측두엽( temporal lobe)부터 망가지기 때문에, 치매상태는 가장 최근의 기억을 잃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반세기전에 사귄 친구는 알아보지만 조금 전 밥을 먹었는지? 오리무중.

신경독소 단백질 베타 아밀로이드의 뇌신경 세포 파괴가 진전되어 전두엽(frontal lobe) 전체가 기능을 잃게되면 급기야 감정조절이 불가능한 인격파괴와 인지기능의 극심한 장애를 초래한다. 슬프게도 인간이 인간다운 사고와 행동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망상(delusion), 편집증(paranoia), 환청과 환시같은 정신병적 증상으로 고통을 받게 된다. 일생 간직했던 아름답고 소중한 기억들은 영원히 사라지고 내 가족, 친지 모습 조차도 구분할 길이 없게 된다. 더 이상 의미있는 대화는 불가능한 지경에 이른다.

우울증, 갑상선 기능 저하, 비타민 B12와 엽산(folic acid) 결핍으로 인한 치매는 회복이 가능할 수도 있으나, 알츠하이머 혹은 혈관성 치매의 회복은 가능하지 않다고 한다. 사랑하는 이들이 치매에 희생을 당하여 처참한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은 미어질듯 가슴이 아픈 일이다. 큰 아들의 쌍동이 손녀들이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한지 두 해가 됐다. 타고난 재주가 있는지 여부를 아직 알 길이 없으나, 큰 아들 부부의 극성에 가까운 열정과 아이들 훈련방식은 뜻밖에 커다란 결과를 가져왔다. 2017년도 제이십회 뉴욕 음악경연대회(NYMC), 연령별 바이올린 부문에서 쌍동이들이 일,이등으로 나란히 입상한 것이다. 하이든(Haydn)과 카발레브스키(Kabalevsky) 협주곡을 연주하는 모습에 경탄할 뿐이다. 장영주(sara Chang), 강주미, 김다미 , 신현수 그리고 김봄소리…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E minor OP 64, 세 악장 전 연주 동안 조금도 빗나가는 일이 없는 장영주의 암보(악보를 암기하는 능력)는 거의 불가사의 하다.

시들어 가는 기억력의 영역을 걷고있는 지금, 젊은 날의 경이로웠던 한때를 생각해 본다. 여류시인 이경조씨는 노래한다. 살같이 가던 세월 지름길로 들었나 나이 덜어 내다 팔고 젊음에 세 들까 옳거니! 지금 여기가 꽃밭인 줄 몰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