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성경상식 26] 애꿎은 무화과나무에 화풀이를 하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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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원(시카고언약장로교회 목사)

반기독교 무신론자였던 철학자/수학자 버틀란트 럿셀은 예수를 성질 나쁜 과격분자로 단정했다. 그 근거로 드는 것 중의 하나가, 아직 제 철이 되지 않아 열매가 없었던 무화과나무를 배가 고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버럭 화를 내 저주하여 말라죽게 만든 것으로 보이는 사건이었다. 우리 성경도 분명하게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11:13b)고 밝히고 있다. 참 이상도 하시다. 왜 철도 아닌데 열매가 없다고 확 죽여 버렸는가 말이다. 그러나 성질이 나쁜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실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무식하게 사람을 단죄하는 럿셀인 것 같다.

이제 곧 사순절의 끝인 고난주간이 다가오는데, 그 고난주간에 해당하는 어느 시점이었다. 예수께서 스가랴 9:9의 예언을 각본 삼아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들어가신 후였다. 자세히 모두 읽어보자.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다음날]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막 11:12-14, 20-24).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일이었던가?

정상적인 무화과나무는 유월절(부활절)이 다 되어갈 무렵 오늘날 ‘타크시’라 불리는 초기 상태의 열매를 매달고 있다. 우리가 학명으로 ‘Aralia elata’라 불리는 나무의 새순을 ‘두릅’이라 명하여 따먹듯이 유대인들은 9-10월의 숙성한 무화과처럼 단맛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이 애기 무화과를 따먹어 허기를 면하고는 했다. 예수께서 본 이 무화과나무는 잎사귀는 있었지만 그 ‘타크시’가 없었던 것이다. 그 때 쯤에 ‘타크시’가 없는 무화과나무는 가을이 되어도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 너무 뻔했다.

이 비운(悲運)의 나무는 정상적인 무화과나무가 아니었다. 잎만 무성하여 현혹하는 ‘위선적인’ 무화과나무였다. 그래서 땅만 버리고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결실불가의 나무를 말라죽게 하신 예수님의 기적은 일종의 퍼포먼스, 즉 행위 비유였다.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짐을 당할 것이다(마 7:19, 눅 3:9). 이 나무는 잎만 무성하다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달아 죽이고 주후 70년 로마와의 전쟁에서 폐허가 되는 예루살렘의 신세를 전조(前兆)하고 있었다. 지금도 열매 없이 헷갈리게 잎만 무성하여 희망이 없는 위선적 신자들에게 주는 준엄한 각성의 말씀이기도 하다.

예수께서는 실속 없는 위선을 유달리 싫어하셨다.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존경하며 인정하는 주변 분위기에 오래 익숙해져 하늘을 향하여 두 손 뻗고 기도도 잘하며, 구제할 때 적절한 제스처로 자신의 자비심이 확실하게 눈에 띄게 광고하고, 금식할 때 굳이 선전하고 다니기에는 쑥스럽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대번에 눈치챌 수 있게끔 초췌한 얼굴을 과장하여 발연기를 잘하는 ‘외식하는 자들’은 이미 자기 상을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수여하여 다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받을 상이 없다고 선언하셨다(마 6:1-5). 잎은 무성한데 예수께서 따먹을 열매는 없는 쭉정이들이었다. 아, 이러지 말아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