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개혁주의 신앙: 구원의 순서(소명/중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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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국 목사/로뎀교회 담임

무인도에서 태어나서 홀로 사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중생 되기 전 이 사람은 어떻게 살아갈까? 이 사람에게 있어 죄란 무엇일까? 십계명을 기준으로 생각해 보자. 성경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이 사람은 공경할 부모가 없다. 살인하지 말라고 하지만 살인할 사람이 없다. 간음하지 말라고 하지만 간음할 사람이 없다. 도둑질하지 말라고 하지만 도둑질할 일이 없다. 거짓증거 하지 말라고 하지만 거짓말할 사람이 없다. 네 이웃의 물건을 탐내지 말라고 하지만 탐낼 이웃의 물건이 없다. 겉으로 보기에 이 사람은 어떤 죄도 지을 수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정녕 이 사람은 죄인이 아닌가! 아니다. 죄인이다. 그의 마음속에 죄의 씨앗, 죄의 본질이 자리 잡고 있다. 죄의 본성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이 없기에 겉으로 나타나지 않을 뿐이다. 이 사람에게 21세기 최첨단 환경을 준다면 보통 세상 사람처럼 죄의 열매가 나타날 것이다. 이 사람은 무인도라는 제한된 환경에 있기에 겉으로 드러나는 죄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이 사람에게 있어 나타난 죄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을 찾지 않으려는 모습, 삶에 대한 미움과 불안함, 자신에 대한 분노, 동물들에 대한 학대 정도일 것이다.

만약 이 사람이 중생한다면 어떻게 회심할까? 아직 언어로 기록된 성경 말씀을 접하지 않았다고 가정하자. 아니 언어를 배우지 않았기에 성경 말씀을 누가 전한다고 해도 지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가정하자. 회심은 회개와 믿음으로 구성된다. 죄에 대해서 돌아서는 것이 회개이다. 이 사람에게 있어 회개는 어떤 모습일까? 부모가 없기에 부모를 거역함에서 돌아설 필요가 없다. 사람이 없기에 사람을 미워함에서 돌아설 수 없다. 간음한 적이 없기에 간음에서 돌아설 이유가 없다. 도둑질에서도 마찬가지고, 거짓말에서도 마찬가지며, 탐심도 마찬가지다.

믿음은 창조주의 임재를 알고 그분의 뜻대로 이해하며 그분의 뜻대로 느끼고 그분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명확한 계시를 담고 있는 성경 말씀을 모르기에 말씀이 규정한 대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지 못할 것이다. 이를테면 우상을 만들지 않는 것, 안식일을 지키는 것, 더 나아가 예수님에 관한 정보나 행적, 하신 일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일 같은 것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이웃이 없기에 이웃을 사랑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에게 있어 회심은 어떤 의미일까? 아마도 무신론에서 유신론으로 바뀌는 것, 하나님에 관해 무관심한 태도에서 하나님을 찾는 태도로 바뀌는 것, 불안, 불평, 불만족에서 평안과 감사하는 마음으로의 변화, 하나님 부재에서 하나님 임재를 경험하고, 가난한 마음과 애통해 하는 마음을 가지는 정도일 것이다. 나중에 이 사람이 언어를 배우고 언어로 기록된 말씀을 이해하면 성경 말씀을 사실과 진리로 받아들이고 말씀에 관해 더욱 목말라 할 것이다. 예수님에 관한 부분을 읽을 때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사실로 인정할 것이다.

이처럼 개혁주의의 구원론에서 회심을 중생 이후로 두는 이유는 구원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두기 때문이다. 사람이 언어로 기록된 성경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택한 자를 위해서 하신 일을 알고 그 일을 사실로 믿음으로 구원받지 않는다. 심지어 예수님의 피가 자신을 깨끗해 했다는 확신 때문에 구원받지 않는다. 오히려 거듭나므로 구원받으면 믿음의 은혜와 확신의 은혜가 생긴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서 성경을 접하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성경이 기록된 대로 믿으며 계속해서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에 목말라하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한다. 이처럼 회심(회개/믿음)을 중생의 결과로 볼 때 각 사람이 처한 삶의 정황에 좌우되지 않고 구원의 조건과 성취를 일관성 있게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