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개혁주의 신앙: 구원의 순서(소명/중생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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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국 목사/로뎀교회 담임

-이어서-

어느 날 평소대로 남의 것을 강탈하다가 붙잡혀 십자가에 처형당하게 된다. 그런데 구원자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던 예수가 죄인의 한 사람이 되어서 자기 옆 십자가에 달려 있지 않은가? 이것은 큰 충격이다. 어떻게 예수가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릴 수 있지? 십자가 밑에서 바리새인과 유대인과 대제사장들과 로마 군인과 군중은 그를 조롱하며,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하지만, 그는 그냥 그곳에 달려 고난받고 있다. 그는 십자가에서 내려올 능력이 없단 말인가?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가 있단 말인가? 강도는 이런 상황이 그저 혼란스럽기만 하다. 과연 예수는 그의 말처럼 구원자인가 아니면 무리의 주장처럼 죄인인가? 그는 그동안 예수가 구원자일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소망이 있었지만, 이제 이 소망이 사라지는 것 같다. 혼돈 속에서 강도는 다른 무리처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예수를 욕한다(마 27:44). 하지만 예수는 여전히 그곳에 달려있다. 심지어 강도와 똑같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에게 고통을 주고 조롱하는 로마 군병이나 유대 지도자들에게 어떤 공격적인 말도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축복한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어떻게 자기에게 고통을 안겨준 사람을 위해 간구할 수 있지? 그는 정말로 죄인들을 위해 오신 구원자인가?”

예수님의 이런 자비로운 모습에서 강도는 서서히 확신이 들기 시작한다. “그래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저분은 하나님의 아들이 틀림없어. 도대체 그의 잘못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가 어떤 악한 짓을 했단 말인가? 악인의 최후가 절대로 저럴 순 없지. 나는 저분에게 내 마지막 희망을 걸겠어.” 강도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여전히 예수를 조롱하는 또 다른 강도를 꾸짖는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눅 23:40-41). 그리고 예수에게 자신의 영혼을 부탁한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 하지만 이렇게 간구하면서도 완전히 확신하지는 못하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만약 예수가 나의 간구를 거절하면 어쩌지? ‘너는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그 죄가 너무 커서 용서받을 수 없다’라고 하면 어쩌지? ‘너는 고범죄를 지었고 성령을 훼방했으니 지옥으로 가야 한다’고 하면 어쩌지?”하지만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을 용서한 예수는 아니나 다를까 그의 간구를 흔쾌히 받아들인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만약 앞에서 기술한 이야기가 맞는다면, 강도의 중생은 언제인가? 언제 성령께서 그에게 새로운 영을 주셨나? 얼핏 보기에는 그가 마지막에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말할 때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그 이전부터 이미 거듭나게 하셨을 수도 있다. 말하자면 그가 불우한 환경에 태어났을 때든지, 랍비들로부터 성경을 띄엄띄엄 들었을 때 이미 거듭나게 하셨을 수 있다. 거듭난 영이 조금씩 자라다가 마지막 순간에 큰 확신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다. 인간은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지는 못한다. 자신이 거듭났다고 확신하는 그때가 실상은 아닐 수 있다. 우리는 단지 겉으로 나타난 현상만으로 추측할 뿐이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그 인생 속에서 발생한 정확한 답을 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