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개혁주의 신앙: 구원의 순서(예정 12)

302

 

정성국 목사/로뎀교회 담임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에 관한 또 다른 비유로 영화와 사진과의 관계를 들 수 있다. 영화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찍은 수많은 사진을 순서대로 배열한 것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수많은 장면이 차례로 나타난다. 관객(사람)은 시간의 순간에서 하나의 장면만 본다. 관객은 다음에 어떤 상황이 진행될지 알지 못한다. 물론 어느 정도 예상할 수는 있어도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영화의 종결을 알 수 있고 처음과 끝이라는 시간의 과정이 기억이라는 순간(값은 0) 속에 남는다. 그러나 초월적 존재는 영화의 모든 장면(사진)을 순간에 본다. 수 만장이 되는 영화의 필름을 겹쳐놨다고 가정해 보자. 사람의 눈에는 그저 검은색, 또는 하얀색(빛의 경우는)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4차원의 존재는) 수 만장의 겹쳐진 필름속에서 아무런 내용도 볼 수 없고 아무것도 해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있어서 시간은 찰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월적 존재의 눈에는 이 모든 겹쳐진 장면이–사람에게는 시간이라는 과정에서 진행된 것이–찰나에(0의 값으로서) 보이고 해석된다(영원이라는 시간도 초월자에게는 찰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 자유와의 관계가 이와 유사하다. 하나님의 예정은 영화의 모든 장면을 찰나에 보는 것이고, 인간의 자유는 찰나에 찰나의 장면만 보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런 상항에서 관객은 앞으로 영화가 어떻게 진행될지 추측할 수는 있어서 알지 못한다. 그러나 초월자는 시간의 순서에 따라 보지 않고 찰나에 보기 때문에 안다. 이는 마치 시간의 순서에 의해 배열된 영화의 모든 사진을 한 장의 사진으로 보는 것과 같다. 초월자는 미리 영화를 봤기에 영화의 내용을 아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찰나에 보기에 안다. 이와 유사하게 하나님은 과거에 미리 아신 것이 아니라 찰나에 안다. 과거에 미리 결정하신 것이 아니라 찰나에 결정한다. 어떤 설교자는 예정을 설명하면서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예를 들었다. 그 설교자는 시간 관계상 대한민국과 이탈리아의 경기를 보지 못해서 녹화된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는 이미 대한민국이 이긴 것을 알고 있기에 축구를 보는 내내 결코 당황하거나 긴장하지 않았다고 하며 예정이란 이미 결정된 것을 보는 것과 같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하나님의 예정을 적절히 표현하지 못한다. 오히려 숙명론에 대한 설명이라고 봐야 한다. 하나님의 예정은 결정되었지(과거) 않고 결정되는(찰라) 것이다. 인간은 축구경기의 결과를 시간의 진행에 따라서 알아가지만, 초월자는 미리 보았기에(과거) 아는 것이 아니라 그저 찰나에 안다.

예정과 자유가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 중에 한가지는 이 두 용어가 사는 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자유는 4차원 세계의 단어라면 예정은 5차원 이상의 단어이다. 이는 마치 선이 1차원의 단어이고 면이 2차원의 단어인 것과 유사하다. 높이는 3차원의 단어이고 개념이지 2차원에서는 높이라는 개념도 없고 단어도 없다. 시간은 4차원의 단어이고 예정은 5차원 이상의 단어이다. 자유가 4차원의 용어라고 한 이유는 자유가 시간의 흐름 속에 있기 때문이다. 즉 미래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따라서 미래에 관한 의사결정권이 나에게 있기에, 현재라는 순간을 살아가는 자에게는 자유가 존재한다. 숙명이란 없다. 이데아 예정–완전한 예정이라는 플라톤 개념을 도입해 보자–은 5차원 이상의 단어 용인데, 이것을 사차원의 (평범한)예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예정과 자유는 서로 만날 수 없는 영원한 평행선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두 선은 뫼비우스의 띠에서는 만난다. 문제는 인간은 뫼비우스의 띠에서 두 선이 만나는 이 부분을 볼 능력이 없다. 그래서 모순처럼 보이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