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개혁주의 신앙: 하나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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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국 목사(트리니티 신학대학원 논문심사위원)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이 사차원의 우주 안에서는 경험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지으신 분이지 이 세상 안에 제한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 방식은 우리가 정확히 이렇다 저렇다 딱 잘라 말할 수 없다. 인간은 그저 주어진 계시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조금, 그러나 충분히 이해할 뿐이다. 그래서 삼위일체를 공부하기 전에 먼저 가져야 할 자세는 겸손이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음을 이해해야 하고, 자신이 모를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하여 인간이 알기에 충분히 계시하기는 했지만, 전부를 계시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삼위일체는 모순처럼 보인다.

어떤 원시인이 미국에 구경을 왔다. 이 사람은 아직 돌도끼를 사용하는 그런 원시인이라고 가정해 보자. 이 사람은 미국에 한 일 년 사는 동안에 여러 가지 첨단 문명을 접했다. 자동차, 컴퓨터, 리모컨, 스마트 폰 등등… 그런 후 그는 자신이 사는 고향으로 돌아간다. 부족 사람들이 와서 “당신이 구경하러 간 그 세상은 어떠하냐”고 묻는다. 이 사람은 무엇을 설명할까 생각하다가, 전기에 관해서 설명하기 시작한다. 이 동족 원시인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분명 전극이나 플러스마이너스, 트랜지스터, 반도체와 같은 용어를 사용해서 설명할 수 없다. 전혀 알아 들일 수 없을 것이다. 이 사람은 자기 원시 부족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추어서 설명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내가 가본 세상에는 전기가 있는데, 이는 마치 영적인 힘과 같기도 하도, 엄청난 마술과도 같고, 하늘의 번개와도 같다. 전기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긴 나무 넝쿨이 필요하고, 이것을 높은 나무 위에 묶어서, 전기라고 하는 힘을 보내면, 태양처럼 밝은 광명이 나기도 하고, 사람을 태울만한 불이 나오기도 하며, 하늘을 날 수 있게 만드는 힘도 나온다. 또한 이 영적인 힘은 너무 세서 함부로 만지다가는 죽을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밖에는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면 자동차는 어떠한가? “내가 여행 간 곳에는 자동차가 있는데, 쇠로 된 네발 달린 짐승이다. 이것의 옆구리는 뻥 뚫려 있어서 안을 볼 수 있고, 이 짐승의 몸에는 네 사람이 들어갈 수도 있다. 다리는 동그랗게 생겼고, 이 짐승의 앞뒤로 눈이 가득하다. 밤에는 눈에서 태양 빛이 나오고, 이 짐승의 목소리는 우렁찬 코끼리 소리와도 같다.” 이렇게 설명하지 않겠는가? 그들의 수준으로 낮추어서 설명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말을 듣는 부족 사람들은 머릿속으로 어떤 그림을 그릴까? 실제와는 많이 다른 그림이 나오지 않을까? 자동차를 괴물처럼 그리지 않을까? 전기를 신비한 영적 존재처럼 그리지 않겠는가? 삼위일체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전혀 경험할 수 없는 존재 방식을 인간의 언어와 경험 안에 제한해서 설명한다. 예를 들어,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관계가 정말로 우리 인간과 동일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일까? 그렇지 않다. 단지 인간 세상의 부자 관계가 그나마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성자 예수님은 성부가 창조한 분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부로부터 태어난 날이 있지 않다. 성자는 성부가 영원에서 계신 것처럼 영원히 계신다. 이는 시공간을 초월해서 계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신다”고 설명한다. 또한 성령은 성부뿐만 아니라 성자에게서도 영원히 나신다 (요 15:26; 갈 4:6).

끝으로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가 완벽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더라도 성경이 말하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개혁주의의 정신이요,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자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