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공부 잘하는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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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환 목사(시카고기쁨의 교회 담임)

 

페이스북에서 흥미로운 사진을 보았다. 누군가 ‘공부’라는 주제어로 검색한 책들을 모아 이런 순서대로 펼쳐 놓았다. <10대, 꿈을 위해 공부에 미쳐라>, <20대, 공부에 미쳐라>, <30대, 공부에 다시 미쳐라>, <40대, 공부 다시 시작하라>. 압권은 마지막 책. <공부하다 죽어라>.

요즘 유행하는 표현을 빌려 묻는다. 공부란 무엇인가. 신영복 선생의<담론>에 의하면, ‘공부(工夫)’라고 할 때 공(工)은 하늘(一)과 땅(一)을 잇는다는 뜻이며, 부(夫)는 그 둘을 연결하는 주체가 사람(人)이라는 뜻이다. 공부(工夫)라는 글자에 하늘, 땅, 사람이 다 들어 있다. (어릴 적 누가 내게 이것만 가르쳐줬어도.)

하늘과 땅은 본질적으로 다른 세계다. 땅의 현실에 의해 배반당한 이들은 주저앉아 하늘을 본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틀렸다. 하늘은 스스로 도울 힘 없는 이들을 돕는다. 아무도 귀기울여주지 않아 하늘 향해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일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들, 그들을 돕는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땅의 질서에 억눌린 이들이 하늘을 경험하게 해 달라는 기도다. 하늘과 땅을 잇는다. 주기도는 공부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면 아내는 슬쩍 나를 향해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다. 한 점 부끄럼이 없는지 봐 달라는 뜻이다. 청년 윤동주에게 하늘은 그런 존재 아니었을까? 나는 바르게 살고 있는가, 인생을 비춰보는 거울. 땅에 얼굴을 묻고 욕망에 이끌려 사는 이들은 하늘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러니 온 몸에 수 만 점을 묻히고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 공부 좀 하길.

정호승 시인이 어느 추운 겨울날 국화빵을 굽는 중년의 남자를 보고 시를 썼다. 제목은 <국화빵을 굽는 사내>. “당신은 눈물을 구울 줄 아는군/ 눈물로 따끈따끈한 빵을 만들 줄 아는군/ (중략) 당신은 눈물에 설탕도 조금은 넣을 줄 아는군/ 눈물의 깊이도 잴 줄 아는군/ 구운 눈물을 뒤집을 줄도 아는군.”

이제 국화빵은 그냥 국화빵이 아니다. 한 중년 남자의 눈물이고 인내이며 희망이다. 시인들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을 뒤집는다. 그들에게는 초라하고 평범해 보이는 일상 속에 담긴 풍요를 보는 눈이 있다. 땅에 임한 하늘을 보는 눈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그것은 믿음의 눈이다. 세상 나라에 침투해 들어온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영안이다.

야곱이 돌베개 베고 자다가 꿈을 꾸었다. 땅에 놓인 사다리가 하늘까지 닿았고, 그 위를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한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다리다. 야곱의 꿈을 엿보셨던 걸까? 예수께서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신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1:51). 예수께서 곧 야곱의 그 사다리다. 그야말로, 공부(工夫)다.

어떤 칼럼을 쓸 것인가, 고민 끝에 바람 하나는 생겼다. 사다리 하나 놓는 마음으로 쓰는 글. 40대 중반, 공부 다시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