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구원의 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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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목사(두란노침례교회 담임)

헤롯 대왕의 손자 헤롯 아그립바1세는 할아버지를 닮아 권력 욕심이 대단했습니다. 3년을 통치하는 동안 권력 유지를 위한 자금 마련과 자기 말에 순종적인 자를 세우기 위해 대제사장을 3번이나 갈아치웁니다. 또한 유대 사회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환심을 사기위해 그들에게 눈엣 가시와도 같은 교회를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권력의 생태를 잘 아는 헤롯은 교회 리더들을 쳤습니다. 사도 야고보가 그 첫 희생자가 됩니다. 그런데 성경이 이 엄청난 사건을 단 몇 단어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성경을 보면 일곱 개의 단어, 그중 접속사와 수식어를 빼면 딱 세 단어를 사용해서 마치 아무 일 아닌 것처럼 기술하고 있는 겁니다.

야고보는 요한 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의 형이고 열 두 사도 중에 한 사람입니다. 게다가 동생 요한과 베드로와 함께 늘 예수님 최측근에 있던 사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실 때, 십자가 수난을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이 세 사람과만 동행하셨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인물의 순교를 무심하다싶을 정도로 다루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깊이 묵상하던 중 갑자기 ‘구원’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고 자신이 천국 백성임을 확신하고 있는 야고보에게 죽음이란 슬픈 일도 또한 특별한 일도 아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아주 특별한 사건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완전한 이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구원을 확신하는 성도들은 죽음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죽음이란 영원한 삶이 있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에 불과한 겁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은 성도들의 죽음을 영광스러운 일, glorification(영화)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야고보의 순교를, 이 방 문을 열고 저 방으로 들어간 것처럼, 아주 간단하게 다루고 있는 겁니다.

야고보에 이어 죽음을 앞둔 베드로도 구원에 대한 확신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헤롯은 잡혀온 베드로를 철저하게 감시했습니다. 4명으로 구성된 4개 팀이 6시간씩 돌아가며 24시간 베드로를 지켰습니다. 감옥 안에 배치된 군사 둘은 자신의 팔과 베드로의 팔을 각각 두 개의 사슬을 사용해 묶어두었고, 그것도 모자라 두 명의 군사가 더 동원되어 감옥 바깥을 지켰으니 베드로는 꼼짝없이 죽게 된 겁니다. 상황이 이 지경인데도 베드로는 잘 잡니다. 마치 자기 집 안방에 누운 것처럼 신발을 벗고 띠를 풀러 겉옷도 벗은채 아주 편안한 자세로 깊은 잠에 빠진 겁니다. 그를 구하러 온 천사가 그의 잠을 깨우기 위해 베드로의 옆구리를 가격해야할 정도였습니다. 베드로의 이 깊은 잠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아니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내일 죽는다 해도 자신이 갈 곳이 주님 계신 천국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믿는 베드로에겐 죽음이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겁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 때문에 세상의 모든 시험과 유혹을 이겨낸 성경의 인물들을 죽 나열하면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구원에 대한 믿음이 확실한 성도들을 이길 수 있는 세력은 이 땅에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은 악한 세력과 끊임없이 영적 씨름을 치러야 하는 광야의 여정입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은 이 싸움에 꼭 필요한 무기입니다. 천국 소망으로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한 성도들은 영적 전쟁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도착할 때까지 이 구원의 투구를 결코 벗지 않는 용사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