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나를 따르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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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국 박사(횃불재단 트리니티 목회학 박사 프로그램 담당)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24).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분명 무리와 제자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만 하더라도, 대략 삼만 명 정도의 유대인이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했다. 죄수는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지고서 형장까지 걸어가야 했다. 따라서 그 당시로서는 죄수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광경은 흔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죄수를 처형하는 형틀이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음을 향하여 나아간다는 뜻이었다.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형장까지 걸어가는 것은 수치스럽고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렇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것도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날마다 죽는다고 했다. 실로 그는 매일 죽음과 직면하고 있었다.
프랑스에는 광야박물관이 곳이 있다. 이 박물관은 18세기 프랑스에서 있었던 개신교에 대한 극심한 박해를 피해, 성도가 들판이나 산지에 비밀리에 모여 예배드리던 역사적 현장과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만들었다. 당시 가톨릭교회의 지지를 받던 프랑스 정권은 1685년 개혁교회를 승인했던 낭트칙령(1598년)을 철회하고, 프랑스 내에 있던 모든 개혁교회를 박해했다. 개혁교회의 예배를 금지하고, 집회에 참석하는 개혁교회 신자에게 사형 및 종신형 등의 강력한 처벌을 선고했다. 프랑스 개혁교회는 그 당시를 “광야교회”라고 부른다.
그러나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개혁신앙을 지키기 위해 싸운 이들의 저항은 참으로 눈물겹고 감동적이다. 목사는 잡히면 특별히 제작된 형틀 위에서 모든 뼈를 부수는 참혹한 고문을 당한 뒤 사지가 절단되고 마지막에는 참수형을 당했다. 여자들은 탈출이 불가능한 높은 망대 탑 감옥에 갇혀 수십 년을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살아야 했다. 남자들은 예외 없이 끌려가 프랑스 왕의 전함 밑창에서 죽을 때까지 손목과 발목에 쇠고랑을 찬 채 노를 젓다가 거기서 죽어야 했다. 수없이 많은 성도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노예선에서 죽어갔다.
그런데 광야박물관의 많은 전시품 중에 유난히 눈길을 끄는 한 점의 전시품이 있다. 아마도 파선된 노예선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지는 조그마한 나무판이다. 거기에는 피골이 상접한 한 노 젓는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그의 손목과 발목에는 쇠고랑이 채워져 있다. 그런데 그 그림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주님, 제가 제 손목의 쇠고랑을 당신과의 혼인 반지로 삼게 하시고 제 발목의 쇠고랑을 당신 사랑의 사슬로 여기게 하소서.” 이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다. 주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을 의미한다. 주를 위해 고난을 받으며 주님을 따르라는 것이다. 오늘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이 잘못 사용될 때가 많다. 인생에서 만나는 무거운 환경을 자기 십자가라고 한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자기 십자가란 예수 믿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의미한다. 물론 오늘날 우리는 신앙 때문에 핍박받는 일은 거의 없다. 이는 분명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복이다. 그러나 그 당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는 희생이 있었다. 유대교에서 출교당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는 곳이 많이 있다. 예컨대 북한이 그렇다. 무슬림 사회도 그렇다. 그러한 곳에서는 신앙 때문에 당하는 핍박이 크다. 안타깝게도 미국도 이미 시작되었다. 하지만 사람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라도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롬8:18). 장래의 영광이 너무나도 귀하고 값지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