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의 허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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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한미자유연맹 부총재)

  최근 한국전 종전선언에 관련하여 갑론을박이 많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과 한국정부는 종전선언체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듯하다. 종전선언 강조는 시도 때도 없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달 29일 로마 방문 중에도 문대통령은 종전선언에 대한 메시지를 피력했다. 물론 미국 측은 문대통령과 다른 입장을 피력 중이다. 그런데 종전선언이 허구성이 많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제이크 설리번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지난달 26일 “한·미는 각각의 종전선언 조치를 위한 정확한 순서·시기·조건에 관해 다소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다”고 밝힌바 있다. 다소 다른 관점. 한국정부와는 다른 관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핵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북한체제는 종전선언이니 평화협정이니 하는 것을 미국의 소위 대북적대시정책 철회, 즉 한미훈련 중단, 한미동맹 해체, 주한미군 철수 등과 같은 뜻으로 주장한다. 가령 북한 ‘백과사전’에 정의된 ‘평화협정’의 개념 자체가 “남조선 강점 미군 철거”라고 돼 있다.

역사를 들여다봐도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이 평화를 가져온 사례를 찾기 어렵다. 특히 공산주의· 전체주의 세력과의 평화협정은 더욱 그렇다. 우리가 잘 아는 베트남 공산화 과정도 그렇다. 한반도처럼 남북, 자유민주주의·공산주의 진영으로 갈라져 싸우다 1973년 1월27일 파리에서 평화협정을 맺었다. 그리고 남베트남에서 미군이 철수해 버렸고 2년 뒤인 1975년 4월30일 베트남 전체가 공산화된다.

중국 공산화도 마찬가지이다. 1945년 10월10일. 항일전에서 승리한 중화민국 장제스총통이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과 충칭에서 만나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인 쌍십협정에 합의한다. 이 협정으로 양측은 평화‧연대와 민주주의 수립, 국민 자유 보장 등에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그런데, 8월29일부터 40여 일 간 진행되는 회담 기간에도 공산당은 소련 점령지인 동북지역에 병력 11만 명과 당 간부 2만 명을 보내 무력 통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는 뒤늦게 만주에 병력을 투입했지만 이미 늦었다.

공산주의자들의 종전선언과 평화약속은 언제나 전쟁을 위한 사기극이었는데, 장 총통은 2번의 국공합작에 이어 또 다시 속았던 것이다. 이후 본격적인 국공내전, 장개석 군대와 모택동 군대의 싸움이 6·25사변 직전인 1950년 5월까지 벌어진다. 흔히 우리는 국민당이 부패했고, 공산당은 민심을 얻어서 이겼다, 이런 식으로 알고 있지만, 그 이전에 소련의 지원과 공산당의 잔인함에 무릎을 꿇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평가일 수 있다. 홍콩대 석좌교수인 프랑크 디쾨터의 ‘인민 3부작’을 보면 공산당 임표가 동북지역을 장악해가던 48년 5월30일 “창춘을 죽음의 도시로 만들라”는 모택동의 명령을 받게 된다. 약 50만의 민간인과 10만의 국민당 군대는 150일간의 포위 공격으로 16만 명이 굶거나 병으로 숨진 뒤 항복했다.

공산군은 장춘을 장악한 뒤 동북지역을 손에 넣었고 이듬해인 49년 1월22일 베이징에 무혈입성을 한다. 그해 4~5월에는 국민정부의 수도인 난징과 상하이를 공격해서 점령했다. 그리고 10월1일 모택동은 베이징 천안문 망루에 올라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한다. 이 국공내전에서 군인 175만을 포함해 600만~700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민의 적은 죽여야 한다는 모택동의 확신에 따라 말 그대로 국민당 측을 섬멸해 버렸다. 결국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은 이런 살인마의 대량학살을 준비시키는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모택동과 함께 20세기 최악의 학살자는 히틀러이다. 중화민국뿐 아니라 폴란드‧소련도 종전선언, 평화협정, 불가침 협정을 맺은 상대의 대대적인 침략을 받고 비극적인 전란을 겪었다. 폴란드는 32년 소련과, 34년 나치 독일과 각각 불가침 조약을 맺었지만, 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의 침공에 이어 9월 17일엔 소련의 공격을 받고 나라가 분할 점령됐다. 소련도 히틀러에게는 뒤통수를 맞았다.

39년 8월23일 나치 독일과 독‧소 평화협정인 불가침 조약을 맺었지만 41년 6월22일 독일의 침공으로 국토 서부가 초토화하고 2,000만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피를 흘렸습니다. 폴란드의 비극과 소련이 나치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은 평화나 불가침 협정이나 조약이 순식간에 휴지화할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76년 전 중국의 쌍십협정에서 통일 뒤 어떤 국가를 이룰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공산당에 시간을 벌어준 것이 국민당 정부는 물론 한민족에게도 통한의 기억이다.

북한과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도 한미동맹 해체와 주한미군 철수 그리고 김일성 세력의 전쟁 같은 도발 혹은 그렇지 않다고 하여도 적화통일의 도구로 악용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한국의 정치권은 물론 많은 대형교회들이 이런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촉구하며 기도문까지 돌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