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품위 있는 쇠락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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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환 목사( 시카고 이민자보호교회 TF 위원장)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악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에게서 그것이 나타나면 누구나 혐오하는 악, 그리스도인 말고는 자신에게도 그런 악이 있다는 것을 생각조차 못 하는 악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보다 더 싫어하는 악이 없으면서도, 이보다 더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악도 없습니다. 이 악이 많이 있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는 이 악을 더 싫어합니다.

C.S.루이스의 책 <순전한 기독교>에 나오는 대목이다. 그가 말하는 이 악은 무엇일까? 누구나 자유로울 수 없는 악이지만 자신에게 그런 악이 있다는 건 거의 깨닫지 못하는 악, 바로 교만이다. 마지막 문장이 재밌지 않은가? 이 악이 많이 있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는 이 악을 더 싫어합니다. 교만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교만을 더 싫어한다니, 부인할 수 없는 진리다.

사회에서는 폭력이나 도둑질 등을 악으로 여기지만 교만을 악한 죄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교만을 죄악으로 여긴다. 그것도 가장 큰 죄이며 모든 죄악의 근본으로 여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만을 모든 죄악의 어머니라고 불렀고, C.S 루이스는 교만은 지옥에서 곧장 온다고 말하기도 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교만한 자는 반드시 추락한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교회야말로 자신의 교만을 거의 깨닫지 못하기에 쇠락은 한순간에 찾아온다. 한국교회가 교단마다 세계 최대를 자랑하던 시기가 있었다. 잘 살아보세와 함께 교회 성장을 최대 목표로 삼아온 한국 교회가 이제 사회의 추문이 되며 추락하고 있다.

교회 역사를 보면 부흥의 시기가 있고 쇠락의 시기가 있었다. 지금이 교회의 부흥 시기가 아니라 쇠락의 시기라는 점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교회가 쇠락하는 시기에 물어야 할 질문은어떻게 하면 다시 치고 올라갈 것인가가 아니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시도가 추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여, 내려가는 시기에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어떻게 하면 잘 내려갈 것인가이다.

영화 <타이타닉>을 보면 모든 이들이 침몰하는 배에서 살아남고자 아우성이던 그 때 당황스러운 음악이 들려온다. 우리에겐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찬송가로 익숙한 바로 그 곡이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모두가 어떻게 살아남을까를 묻던 그 순간, 그 연주자들은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인간의 존엄을 잊지 않고 품위와 예의를 갖추도록 도와주었다.

이문재 시인이 다음 문장을 쓸 때 그는 <타이타닉>의 연주자들을 떠올렸던 걸까. “지구가 파멸되고 인류가 망할 건 분명한데, 시인이 이 침몰을 막을 수는 없지만 침몰의 순간 서로에게 예의를 갖추도록,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조금은 견딜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노래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비관적으로 들리는가? 필자에겐 이게 더 희망적으로 들린다. 교회의 미래에 대한 목사들과 신학자들의 그 어떤 분석보다 영화의 한 장면과 시인의 한 문장이 더 절실한 구원의 언어가 되었다.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이(특히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쇠락의 순간 서로에게 예의를 갖추며 이 피할 수 없는 심판을 조금은 견딜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노래하는 존재가 되는 것 아니겠는가. 비록 그것이 바벨론 그발 강가의 노래가 되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