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이야기] 34. 루이스 오코너(Louis o’ Con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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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문 목사(시카고나눔교회 담임)

한국 고아 사역에 큰 지렛대 역할을 해왔던 루이스 오코너 선교사는 성서에서 강조한 소외 계층과 버림받은 고아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삶을 살았다.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로 (시68:5) 그늘에 가려진 한 영혼을 소중히 여겼다. 고아들에게는 예수님의 사랑이 필요하다. 스위스의 의사이자 작가인 폴 투르니에 저서 ‘고통보다 깊은’에서 상실이 열매를 맺게 하는 결정적 요인은 사랑이라고 말했다. “내 운명을 바꾸고 고아라는 불리한 조건에서 해방해 준 것은 주변의 사람들의 인격적인 사랑이었노라 했다. 제네바의 피에르 렌치니크 박사는 “고아가 세계를 주도한다” 라는 논문에서도 인류 역사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 300여 명을 분석해 보니 고아가 많았다. 예로 헬라제국의 알렉산더 대왕, 로마의 줄리어스 시저 황제, 프랑스의 루이 14세 왕, 미국에서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 우는 조지 워싱턴, 세계 정복을 꿈꾸던 프랑스의 나폴레옹, 해상을 장악함으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는 기초를 놓았던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이스라엘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었던 골다 메이어, 프랑스의 유명한 정치가 비스마르크 수상과 드골 장군 등,300여 명의 인물들이 고아 출신이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이후 쏟아져 나오는 고아를 위해 섬겨왔던 홀트 부부가 있다. 이들의 뒤를 이어 루이스 오코너 선교사는 고아 사역을 홀트 아동 복지회라는 법인 복지기관으로 발전시켜 다양한 프로 그램을 운영하게 된다. 특히 버려진 아이들 중에서도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위해 장애인 보호시설 건립을 시작으로 장애인학교, 휠체어 농구팀 창단 등으로 장애인들이 사회와 소통하게 했다. 그외 해외로 입양된 입양아와 입양가족들의 모국 방문을 주선하는 헤리티지 캠프를 시작으로 장애인 복지, 다문화 가족등 영역으로 넓혀갔다.

루이 오코너 선교사는 1928년 5월24일 미국 알라바마주 버밍험에서 출생하여 샘포드 대학교에서 종교사학과, 텍사스주 남침례회에서 신학교를 졸업후 고향 노우드 침례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버지니아주에서 2년동안 담임목사로 목회 하다가 미국 남침례교 선교사로 파송받아 내한하여 침례교 선교부에서 활동 하였다. 선교 초기에 태어난 아들 티모시 캐럴 오코너가 하루도 살지 못하고 사망하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런 계기로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귀국하여 테네시주 내슈빌의 테네시 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사업을 전공하여 홀트 양자회 (현 홀트 아동복지회)에서 감독으로 활동하다가 홀트양자회 회장으로 취임 받게된다. 홀트 양자회는 홀트 부부가 한국전쟁 고아들을 위해 만든 단체이다. 홀트는 자녀가 6명이 있었지만 자신의 농자를 팔아 한국에 가서 8명 전쟁고아를 입양하게 된다. 해리 홀트의 입양은 미국 언론에서 일제히 보도했고 한국 전쟁 고아에 대한 관심이 커져갔다. 1956년 3월 해리 홀트는 서울 효창공원 기독교 선교부에 땅을 임대해 임시보호소를 세우고 입양 사업을 시작한다. 이것이 홀트아동 복지센터의 전신인 홀트씨 해외 양자회이다.

루이 오코너 선교사는 대학에서 사회사업을 전공하고 준비 된자로 창립자 해리홀트가 세상을 떠난후 홀트 양자회를 맡아서 체계적인 입양을 시도한다. 위탁가정에서 아이들이 입양될때까지 일대일로 양육하는 가정위탁 제도를 도입하여 위탁 아이를 친자식처럼 사랑하는 위탁 부모들의 양육이 이루웠다. 루이스 오코너는 1966년까지 홀트 양자회 한국책임자로 활동하다가 1967년 1월 홍콩 선교사업을 위하여 사역지를 옮기게 되는데 출국전 원아 백여명이 플랜 카드를 들고 눈물을 글썽이며 이별을 아쉬워 하기도 했다. 그의 손을 거쳐 해외 양자 양녀로 나간 고아만 해도 5천명이 넘는다고 한다. 오코너 선교사 자신도 2명 고아를 양자로 삼았다. 구호가 아닌 예수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으로 살아갔던 그들의 삶을 기억해야 될것이다.(참고문헌: 양화진 선교회 홈페이지, 내한선교사 총람, 기독교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