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병천 박사의 손자병법인문학] 때로는 돌아가는 것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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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략리더십 연구원장 노병천

간접접근의 승리, 인천상륙작전
우직지계(迂直之計) ― 『손자(孫子) 군쟁 제7편』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는데 앞으로 전쟁이 발발한다면 어디입니까?” “네, 한반도입니다.” 1946년 영국 로이터 통신 기자의 질문에 주저 없이 답을 한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예견한 대로 정확히 4년 후 한반도에서 6·25전쟁이 터졌다. 그는 리델 하트였다. 리델 하트는 누구인가? 당시에는 파격적으로 보였던 기계화 전투 방식을 주창해 유명해진 영국의 군사전략가다. 그의 이론은 독일군이 대륙을 휩쓸게 된 전격전(電擊戰)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승리의 비결로 간접접근 전략(Indirect Approach Strategy)을 주창했다. 그 이론을 담은 책이 『전략론』인데 고대 페르시아 전쟁에서 제1차 중동전까지를 다루고 있다. 그는 30개 전쟁, 280개 전역을 분석해 280개 전역 중 6개 전역만이 직접접근을 통해 승리했고 나머지 274개 전역은 모두 간접접근에 의해 승리를 달성했다고 결론짓고 있다. 리델 하트는 손자병법에 흠뻑 빠진 매니어였다. 그리피스 장군의 박사학위 논문 ‘손자병법’을 애독했으며 그의 책에 손자병법의 명구를 대거 인용했다. 그가 주창한 간접접근 전략은 바로 손자병법 군쟁(軍爭) 제7편에 나오는 ‘돌아감으로써 직행으로 삼는 계략’인 우직지계(迂直之計)에서 나왔다. 간접접근의 개념을 정리하면 이렇다. 직접적으로 힘을 적에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적이 예기치 않은 불의의 방향으로 접근해 적을 동요시켜 균형을 잃게 한 후에 최소의 저항, 최소의 피해로 승리를 달성한다는 것이다.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은 간접접근 전략의 교과서 같은 작전이다. 인천 상륙 계획에 결정적으로 장애가 되는 것은 낙동강 방어선에 투입된 북한군 제1, 2군단의 주력이다. 만약에 이들이 낌새를 알아채고 인천 방면으로 부대를 돌린다면 작전은 허사가 되고 만다. 그래서 이들을 낙동강변에 묶어두기 위해 국군과 미군은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쏟으며 결전했다. 간접접근 전략에 사용되는 용어로 표현하면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견제를 한 것이다. 견제라는 말은 경쟁 대상이 지나치게 세력을 가지거나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하도록 억누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상륙군 주력은 북한군의 배치가 가장 미약하고 저항이 적을 것으로 판단되는 서해안의 해상 기동로를 따라 인천으로 접근했다. 최소저항선과 최소예상선을 택해 적의 배후를 지향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손자병법 시계(始計) 제1편에 나오는 ‘적이 준비되지 않은 곳을 치고, 적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나아가는 것’(攻其無備 出其不意)이다. 인천 상륙 뒤엔 서울을 목표로 군대를 기동함으로써 적의 퇴로와 병참선을 차단해 적을 결정적으로 불리한 위치로 몰아넣었다. 그리하여 적에 의한 저항을 최소화시켜 가장 적은 전투와 최소의 희생으로 서울을 탈환했다. 간접접근 전략이 완벽하게 적용된 것이다. 통상적인 정면 공격 위주의 패러다임을 과감하게 바꿔 간접접근으로 승리를 쟁취한 맥아더 장군의 탁월한 전략적 안목이 돋보인다. 만약에 인천으로 돌아가지 않고 무모하게 낙동강에서 정면 공격만을 고집했다고 하면 엄청난 피해는 물론 어쩌면 부산까지 모조리 점령당해 지금쯤 우리는 북한 인공기를 보고 살지도 모른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과 중공군은 전체 18개 군단급 부대 중에서 무려 9개 군단을 동해안과 서해안에 배치해야 했다. 왜냐하면 유엔군의 또 다른 상륙작전에 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공산군 측은 전력의 50%를 후방에 배치해야 하는 뼈아픈 처지에 빠져든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인천상륙작전은 단 한 번의 작전 성공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전쟁 전체의 흐름에 영향을 미친 결정적 작전이었다.

이제 손자가 말하는 우직지계를 보다 쪼개어 알아보자. 손자는 우직지계를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한다. 돌아감으로써 직행으로 삼는 이우위직(以迂爲直)과 근심을 이로움으로 삼는다고 하는 이환위리(以患爲利)다. 돌아감으로써 직행으로 삼는다고 하는 것은 여러 관점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거리와 시간과 처세(處世)에 있어서의 적용이다. 먼저 거리의 개념이다. 돌아가는 게 실제로는 빨리 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공격 목표가 저 멀리 있는 백두산 고지라 하자. 그곳까지 가는 길은 여러 가지다. 그런데 접근이 쉬운 가까운 길에는 이미 적들이 온갖 방어조치를 다해뒀다. 지뢰도 심어두고 철조망도 쳐놓고 적절히 병력도 배치해뒀다. 이렇게 되면 비록 가까운 길이라 할지라도 그 길을 이용하면 많은 피해를 보게 된다. 가까운 길이라고 해서 결코 가까운 것이 아니다. 이럴 경우에는 비록 멀리 돌아가지만 적의 장애물이 없는 길을 택하는 게 피해를 줄이고 실제로 빨리 가는 길이 될 수 있다. 당장 눈에 보이는 빠르고 쉬운 길만을 고집하지 말라는 교훈이다. 둘째는 시간의 개념이다. 촉박하게 서둘러 일을 이루려고 하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리는 것이 유익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느림의 미학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을 피해 의주로 임금 행차를 모시고 피란을 가는 길에서 있었던 일이다.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졌다. 사람들이 비를 맞지 않으려고 앞을 다투어 뛰어가는 것을 보고 한음 이덕형은 말했다. “어리석은 사람들아, 뛰어가면 앞에 가는 비까지 맞을 것이 아닌가!” 그러고는 혼자서 여유롭게 팔자걸음을 했다고 한다. ‘빨리빨리’ 문화에 젖은 우리에게 ‘이우위직’이 가르쳐주는 느림의 미학은 분초를 다투는 각박한 세상을 여유롭게 만들어 주는 좋은 처방전이 될 수 있다. 느리게 가다 보면 주변을 돌아보며 생각할 여유가 생긴다. 소홀히 했던 사람들도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셋째는 처세의 개념이다. 돌아간다는 것은 때로는 손해도 보고 양보도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삶의 방식은 당장에는 손해 보는 듯이 보이지만 결국에는 좋은 것으로 돌아온다. 선(善)의 부메랑이다. 우직지계의 두 번째 큰 의미는 이환위리다. 근심을 이로움으로 만든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개념이 있다. 첫째 의미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이다. 전국시대 합종책(合從策)으로 6국의 재상을 겸임했던 소진은 이런 말을 했다. “옛날에 일을 잘 처리했던 사람은 ‘화를 바꾸어 복을 만들었고(轉禍爲福)’ ‘실패한 것을 바꾸어 성공으로 만들었다(因敗爲功’” 아무리 어렵고 불행한 일이 있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강인한 의지로 헤쳐 나가면 근심거리를 복으로 바꿔 놓을 수 있다는 말이다.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근심거리가 걸림돌이지만 현자에게는 근심거리가 디딤돌이 되는 것이다. 둘째 의미는 근심과 위협과 도전을 오히려 발전과 도약의 기회로 삼는다는 것이다. 전화위복과 비슷한 의미가 있지만 조금의 뉘앙스 차이가 있다. 토인비는 불멸의 저작 『역사의 연구』에서 인류의 역사를 ‘도전과 응전’으로 설명했다. 파르테논 신전에서 도전과 응전이라는 메타포(metaphor)를 얻었던 그는 외부 도전에 효과적으로 응전했던 민족이나 문명은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민족이나 문명은 소멸했다고 주장했다. 토인비는 저술이나 외부 강연을 할 때면 청어 이야기를 즐겨 인용한다. 청어는 영국 사람들이 아주 좋아해서 거의 매끼 식사마다 식탁에 오르는 생선이다. 그런데 싱싱한 상태로 청어를 북해나 베링해협에서 런던으로 옮기려면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청어의 천적인 물메기 몇 마리를 수조에 함께 넣어두는 것이다. 그러면 청어들은 무시무시한 이빨을 가진 물메기에게 뜯기지 않기 위해서 사방팔방으로 도망 다닌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수산시장까지 도착하게 되는 것이다.

迂直之計
우직지계
돌아가는 것으로 직행을 삼는다

앞을 가로막는 장애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용하느냐에 따라 걸림돌도 디딤돌도 되는 것이다. 어떤 일을 만나면 가능한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만이 최선책이라 생각하지 마라. 때로는 돌아가기도 하고 양보하기도 하고 손해 보기도 하라. 세상의 이치란 묘해서 빨리 간다고 반드시 이기는 것만은 아니지 않은가. 돌아가지만 마지막에 이기는 ‘곡즉승(曲卽勝)’의 심오한 진리를 제대로 깨달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인생은 긴 마라톤이다. 천천히 간다고 결코 늦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