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병천 박사의 손자병법인문학]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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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략리더십 연구원장 노병천 박사

주사위는 던져졌다, 카이사르의 파르살루스 전투

전승불복(戰勝不復) ― 『손자(孫子) 허실 제6편』

“주사위는 던져졌다!” 카이사르의 유명한 말이다. 기원전 49년 1월 10일 루비콘 강을 건너 이탈리아 북부로 넘어갈 때였다. 루비콘 강은 로마에서 동북쪽으로 350km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강이라기보다는 개천에 가까울 만큼 초라하다. 그러나 정치적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로마인들은 군사 쿠데타를 막기 위해 로마를 향하는 군대는 루비콘 강 앞에서 무장을 해제하도록 규정했다.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라이벌인 폼페이우스와 손을 잡고 최후의 통첩을 보냈다. 그것은 군대를 해산하고 카이사르의 본거지였던 갈리아 지역의 총독에서 물러나라는 명령이었다. 강 앞에서 멈춘 카이사르는 장고 끝에 결단을 하게 되는데 이때 그는 그리스 시인 메난드로스의 시를 인용했다. “이 강을 건너면 인간 세계가 비참해지고, 건너지 않으면 내가 파멸한다. 가자, 신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후 후세들은 “돌이킬 수 없는 전환점”,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의미할 때 “주사위는 던져졌다!”의 어구를 인용했다.
카이사르가 내전을 종식한 결정적인 전투는 파르살루스 전투다. 이 전투는 알레시아 공방전과 함께 카이사르의 군사적 천재성을 보여준 대표적인 전투다. 파르살루스 전투는 기원전 48년 8월 9일 그리스 테살리아 지방의 파르살루스 평원에서 벌어졌다. 이때 병력의 규모는 폼페이우스가 보병 110개 대대 47,000명 기병 7,000기였고, 카이사르가 보병 80개 대대 22,000명 기병 1,000기였다. 수적으로 보면 폼페이우스가 보병은 2배, 기병은 무려 7배 정도로 우세했다. 폼페이우스를 따라나서 진영을 가득 매운 원로원의 위원들은 아예 카이사르의 패배를 기정사실화해놓고 폼페이우스에게 질질 끌지 말고 빨리 끝장을 내라고 독촉했다. 폼페이우스의 군대에는 약점이 있었다. 대부분이 신병이거나 전투를 경험한지 오래된 고참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7배나 되는 폼페이우스의 기병은 카이사르에게 절대적인 위협이었다. 전쟁의 승패는 바로 이 기병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달려있었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지금까지 전쟁사에는 없었던 기발한 전략 예비대를 만들었는데 중무장 보병의 제3열에서 6개 대대(2000명)를 차출하여 별동대를 편성한 것이다. 이들은 40대 전반의 최고참병으로 카이사르 밑에서 적어도 10년 동안 싸워온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적 기병대에 로마 명문의 자제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카이사르는 이들에게 창을 투척하지 말고 대신 뾰족한 창끝으로 그들의 얼굴을 겨눌 것을 지시했다. 사실 별동대가 승리의 핵심이었다. 별동대는 적 기병의 눈에 띄지 않게 제3열의 우측 후방에 비스듬히 자리 잡았다. 이제 만반의 준비를 갖춘 카이사르는 평원에 진을 쳤다. 이에 비해 폼페이우스는 높다란 언덕 위에 진을 쳤다. 카이사르는 적을 끌어내리기 위한 유인작전을 펼쳤다. 진영을 걷어치우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수송부대를 왔다 갔다 하고 나팔을 불며 성질을 돋웠다. 폼페이우스가 걸려들었다. 유리한 비탈에서 내려와 평원에 진을 친 것이다. 보병부대는 카이사르가 먼저 공격을 했고, 기병부대는 폼페이우스가 먼저 공격했다. 7000기의 기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1000기를 향해 달려들었다. 용감했지만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카이사르 기병은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고 그 빈자리 때문에 카이사르의 우측면이 노출되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폼페이우스의 기병들이 카이사르의 우측과 배후로 포위 기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바로 이때! 뒤에 숨겨 두었던 6개 대대의 별동대가 일제히 공격에 나섰다. 카이사르의 명령대로 얼굴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자 상처 입을 것을 두려워한 로마의 자제들이 달아나기에 바빴다. 기병전에서 승패가 갈리자 카이사르는 최강의 제10군단이 주축이 된 예비대의 제3열을 앞으로 전진시켰다. 제1, 2열의 지친 병력과 교체한 제3열은 펄펄 넘치는 힘으로 폼페이우스의 좌익을 순식간에 붕괴시켰다. 때에 맞춰 6개 대대 별동대와 기병들은 폼페이우스의 좌측면과 후방을 동시에 강타했다. 힘없이 무너져가는 부대를 보며 폼페이우스는 변장을 하고 몰래 라리사로 도망갔다. 이 전투에서 폼페이우스군은 6,000명에서 15,000명의 전사자가 있었고, 카이사르군은 불과 200명의 병사를 잃었다. 그러나 30명에 달하는 백인대장을 잃었는데 그만큼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이 앞장서서 솔선수범했다는 얘기다. 카이사르는 전쟁터를 돌아보며 폼페이우스 군단의 전사자들을 보면서 외쳤다. “그들은 이렇게 되기를 원했노라.” 폼페이우스는 알렉산드리아로 도망갔다가 믿었던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했다. 이때 카이사르는 그의 죽음을 단 한마디로 표현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폼페이우스의 죽음을 알았다.” 카이사르다운 절제된 문장이다. 아니 시오노 나나미가 인용한 대로 ‘문장이라기보다는 대리석에 새겨진 예술’이었다.
손자병법 허실(虛實) 제6편에 보면 유명한 ‘전승불복’(戰勝不復) 즉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반복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다. 그렇다. 전쟁에서 한 번 이긴 방법은 두 번 다시 그 방법으로 이길 수는 없다. 물론 같은 방법을 반복 사용함으로써 ‘설마’하는 적의 허를 찌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요행에 가깝다. 혹자는 말한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라고. 그러나 이것은 정확히 맞는 말은 아니다. 역사가 그대로 반복될 수는 없다. 상황이 다르고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단지 사람들이 역사의 ‘해석’을 똑같이 반복하는 것뿐이다. 전쟁의 상황도 언제나 다를 수밖에 없다. 지휘관이 다르고 부하들이 다르고 적이 다르고 기상이 다르고 지형이 다르고 상황이 다르다. 전쟁을 할 때마다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뒤에 이어지는 어귀는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응형무궁(應形無窮), 즉 그때그때 다르게 변하라는 것이다. 혁신하라는 것이다. 재빠른 관찰, 유연한 대처, 전혀 새로운 시도를 말하고 있다. 카이사르는 이것을 잘했다. 카이사르가 6개 대대를 별도로 편성해서 전략 예비대로 사용한 예는 전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戰 勝 不 復 應 形 無 窮
전승불복 응형무궁
전쟁에서 승리의 방법은 반복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끝없이 변화하라
여기서 우리는 전승불복의 또 다른 의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원한 승리도 영원한 패배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승리와 패배는 돌고 도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겼다고 해서 절대로 자만해서는 안 된다. 『기업에는 수명이 있다』는 책에는 메이지 유신이래 설립된 일본의 500대 기업의 평균수명은 불과 30년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일본 교토의 이마미야 신사 입구에는 무려 1천년 된 떡 꼬치집이 있으니 놀랍다. 그 비결은 제 때 혁신을 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기업의 수명은 어떨까? 1960년대부터 지난 50여 년 동안 우리나라 100대 기업 중에서 지금까지 생존하고 있는 기업은 불과 십여 개 기업뿐이다. 최근 신설 기업의 경우에는 5년을 버티지 못한다는 기업이 40%나 된다고 한다. 이러니 지금 성공했다고 해서 자만하면 언제 사라져 버릴지 모를 일이다. 정권을 장악한 카이사르는 로마의 사회와 정치에 광범위한 개혁을 실시했다.
z그리고 급기야 종신 독재관으로 선언했다. 그러나 기원전 44년 3월 15일, 브루투스가 이끄는 일군의 원로원 의원들이 공화정을 복고하고자 카이사르를 살해했다. “브루투스, 너마저!”의 절규는 유명하다. 어떤 권력도 영원할 수는 없다. 꽃이 아무리 고와도 오래가지 못하는 것처럼(花無十日紅) 권력 또한 영원할 수 없다(權不十年). 지금 내가 실패했다고 해서 절대로 좌절해서도 안 된다. 영원한 패자도 없는 것이다. 엎어지고 뒤집혀져도 결단코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기회는 있다. 기회는 돌고 도는 것이다. 루비콘 강 앞에 선 여러분들이여, 새로운 모험을 위해 주사위를 던졌는가? 그렇다면 ‘전승불복’과 ‘응형무궁’의 양 날 무기로 단단히 무장하자. 바라기는 책상 위에 “戰勝不復 應形無窮” 두 명구를 적어두고 하루에 세 번씩만 외쳐보면 어떨까?
스스로 깨고 나오면 병아리가 되지만 남이 나를 깨면 계란 반숙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