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왕후가 본 ‘요술 환등기’ 시카고 과학산업박물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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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왕후가 직접 보고 1893 시카고박람회 참석을 결정한 '요술 환등기(Magic Slide)' 시카고 과학산업박물관에 전시되어온 사실을 1893기념사업회 김성규 회장이 밝혀냈다. 인기가 많아 한 때 기념 T셔츠까지 판매하기도 했다.

1893기념사업회 김성규 회장 확인

19세기 조선을 다녀온 입체환등기가 과학산업박물관에 전시되어 온 사실이 1893한국전시관복원기념사업회(이하 1893기념사업회) 김성규 회장에 의하여 알려졌다.
이 ‘요술 환등기(Magic Slide)’는 19세기 스타일의 슬라이드로 미국에서 조선에 파견된 기자에 의하여 조선왕실에서 시연되었을 때 명성왕후가 직접 보고 감탄하여 1893 시카고 콜롬비아 세계박람회 참석을 결정한 신문물이었다는데서 흥미를 끌고 있다. 조선에서 돌아온 거빌 기자는 ‘요술 환등기(Magic Slide)’를 시카고산업과학박물관에 전시했는데 김성규 회장이 2005년 당시 촬영한 자료를 찾았다.

2013년 이래 한국에서 세계전통해양문화연구소 소장으로서 그리고 코리안신대륙발견모임 활동을 이끌고 있는 김성규 회장은 2003년이래 시카고에서 1893한국전시관복원기념사업회 활동을 오랫동안 해온 시카고의 역사적 유물인 요술 환등기(Magic Lantern)가 1893년 시카고 박람회에 조선의 참가를 독려하기 위하여 거빌(A. B. Guerville) 기자가 조선에 가지고 가서 명성왕후에게 보여준 뒤 다시 시카고로 가져와 과학산업박물관에 전시하면서 기념 T 셔츠까지 판매해 온 사실을 사진 자료들과 함께 한국일보에 제공했다.

1893 시카고박람회 참석을 결정한 명성왕후가 본 입체 환등기(Magic Lantern)를 명성황후가 보고 감탄하여 시카고박람회 참가를 결정하게 된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고 김성규 회장은 거빌 기자의 기록을 바탕으로 전했다.
1893년 시카고 박람회에 참가하도록 미국 정부에서는 거빌(A. B. de Guerville·1869~1913) 기자까지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이 꼭 시카고박람회에 참가하도록 독려하고 있었다.
박람회 개최 한 해 전인 1892년 조선에 온 거빌(Guerville) 기자는 궁궐에서 천으로 된 스크린을 벽에 치고 요술 환등기(Magic Lantern)를 시사하여 명성왕후의 관심을 끄는데 성공했다. 거빌은 명성황후의 얼굴을 직접 본 것으로 알려졌다.
그 때 찍었던 것으로 보이는 명성왕후 사진이 1893년 발간된 프랑스 ‘피가로 일루스트레(Figaro Illustré)’ 10월호에 게재되어 있는 것이 확인됐다.

거빌이 조선에 가져온 환등기는 등불을 사용하며 두 개의 렌즈를 통하여 입체로 보이는 환등기로서 ‘마법의 등불(Magic Lantern)’ 또는 ‘마술 환등기(Magic Slide)’라고 불린다.
거빌이 조선 궁궐에서 명성왕후에게 이 환등기를 통해 슬라이드를 보여주었는데 그 내용은 놀랍게도 1879년 프랑스 파리 박람회 현장과 미국의 도시풍경들이었다.
명성왕후(1851~1895)가 조선에서 국제 박람회 장면을 최초로 본 왕실인물이라는 것이다.
김성규 회장은 거빌 기자가 명성왕후를 만나 입체 환등기를 보여주었을 때 명성왕후는 아주 호기심을 많이 보여주었다고 1893년 발간된 프랑스 ‘피가로 일루스트레(Figaro Illustré)’ 10월호에 게재된 거빌 기자의 기록을 소개했다.이 내용은 명성왕후가 1893시카고박람회에 조선이 참가하는데 결정정인 자극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시 상황을 거빌 기자는 이렇게 묘사했다. (이하 1893년 발간된 프랑스 ‘피가로 일루스트레(Figaro Illustré)’ 10월호에 실린 거빌 기자의 묘사 전문)

“얼마 후 우리가 왕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영사기가 설치돼 있는 또 다른 작은 곳으로 안내받아 갔다.
왕후나 왕자는 이 이례적인 영사 상영에 참석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병풍 뒤에 있었다. 외국인 남자는 왕후를 볼 수 없었고 지체가 높은 여자가 아니면 마찬가지였다.
우리도 ‘왕후를 볼 수만 있다면’하는 희망을 품어봤지만, 그런 예외는 헛되다고 생각하고 워싱턴의 백악관, 시카고의 20층 건물, 나이아가라 폭포, 빠른 철도, 그리고 박람회의 멋진 건물 등의 사진을 한국인들에게 제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명성왕후는 요술 환등기에서 보여주는 첫 장면을 보자마자 병풍 뒤에서 나왔다. 환등기에 비치는 그림이 신기하고 너무 놀라서 입이 벌어지고 눈이 확 뜨였기 때문이다. 왕비는 가만히 있지 않고 사진이 투사되는 하얀 장막(스크린) 쪽으로 달려가서 마치 재생되는 방법을 확인하려는 듯 움직이는 그림이 실물인지 그림인지를 확인하려 손으로 몇 번이고 스크린으로 만졌다. 그리고 그녀는 통역자를 불러서 그 장치와 사진 등에 대해 많은 질문을 했다. 새로운 장면마다 그녀는 거기에 대한 정보를 묻고 모든 것에 흥미를 가졌다.
우리는 그녀가 아주 영리하다는 것과 나라를 이끌어가는 데 왕을 돕고 있다는 평판을 떠올리게 됐다. 그녀의 영향력은 아주 컸다. 그녀는 왕과 거의 같은 나이이며 자그마하며 아주 예뻤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극도의 열정이 최고조에 달했다. 왕과 왕자는 우리 곁으로 다가와서 한 시간 가까이 여러 가지 다른 주제에 대해서 매력적인 방법으로 우리와 얘기했다. 병풍 뒤에 앉아 있던 왕후는 대화를 주의 깊게 듣다가 가끔씩 아들을 불러서 또 다른 질문을 했다. 왕은 우리를 즐겁게 할 어떤 것을 하고 싶어했다. 그는 우리에게 15일 후 외국 공사들을 초대해 큰 잔치를 열 것이니 그 전에 떠나지 말고 참석해 주기를 바랐다. 그는 박람회의 많은 것을 부러워했다.”

19세기 중반에 고안된 이러한 입체환등기가 명성왕후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1893년 시카고박람회의 여성관에도 관심을 가져 신문물과 새로운 서양의 여권 신장 프로그램에 깊이 감동하여 이듬해인 1893년 시카고 박람회 참가를 명성왕후가 결정하게 되었다. 1893시카고박람회는 언론인에 의하여 렌즈로 비추는 환등기라는 미디어 매체를 통하여 조선이 참가하게 된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김성규 회장은 그 의미를 부여했다.

1893 기념사업회 김성규 회장은 미주 이민역사는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밭에 강제로 끌려온 노예역사가 아니라 그보다 10년 앞선 1893년 시카고박람회 때 한국전시관에 나타나 현지 고용되었던 박용규와 서병규라는 사실을 밝혀내서 “최초의 미주 이민사 1893년에 시작”이라는 뉴스로 보도되어 시카고 한인역사가 최초 미주 이민사의 시작임을 드러낸 바 있다.

김회장은 한국전시관(Corea Exhibit) 위치를 나타내는 블루프린트를 최초로 발견하기도 했다. 김회장은 특히 시카고박람회 기간이었던 1893년 9월 5일 고종임금의 생일 뱅큇에 사용했던 메뉴판을 찾아내 그 매뉴판에 코리아 국명이 한글로 ‘대조선’이라로 씌인 것을 확인한 바 있다. 김성규 회장은 1893년 시카고박람회 당시 코리아의 참가국명이 영어나 한자가 아닌 한글로 된 ‘대조선’으로 참가했다는 사실을 드러내 <120년만에 시카고에서 돌아온 대조선>이라는 다큐에 출연하기도 했다.

김회장은 이번 방미 기간 아리조나주 호피인디안들이 코리안과 같은 ‘캐지나’라는 풍물놀이를 한다는 것을 현지 확인했고 곧 3주간 노르딕 3국을 비롯한 북유럽을 3주간 탐방하고 9월 3일 다시 한국으로 귀국하여 포항 스카이워크 등 한국에 벌여놓은 많은 일들을 계속 할 것으로 알려졌다.<이점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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