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가운데 소통하며]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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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박민수수 하람교회 목사

 

찬송가 중에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란 제목의 찬송이 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금지곡으로 정하고 부르지 못하게 했던 찬송입니다. ‘금수강산’이란 비단 위에 수를 놓은 듯한 아름다운 산천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뜻합니다. 아버님을 여의고 힘들어하시는 어머님을 모시고 설악산으로 사흘 간의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대전을 떠나 속초까지의 여정은 끊이지 않고 내리는 가랑비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운전하기에는 조금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산허리를 돌아 감기는 비구름과 강원도 지역으로 들어서면서는 본격적으로 비구름 속을 달리는 것과 같았습니다. 아니 비행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할까요? 아쉬운 것은, 길이 너무 잘 정비되어서 굽이굽이 험한 고갯길을 이제는 다니지 않도록, 길고 많은 터널길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편리하기만 한데 무엇이 아쉬우냐고요? 미시령, 대관령, 한계령 등을 넘으면서 멀미로 어지러워하다가 만나는 구름 속의 휴게소와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그립고 아쉬웠습니다. 또 아쉬웠던 것은 예전에 고모님이 설악동에 사셨는데 지금은 관광지역으로 개발되어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룡 폭포니 권금성 정상으로 사람들을 태워 나르던 케이블카를 그리며 찾아간 자리에는 전혀 생뚱맞은 모양의 거대한 관문(?)과 매표소가 나의 어릴 적 추억을 산산이 부셔놓았습니다. 씁쓸한 발걸음을 옮기다가 무심코 들어간 막국수 집에서 위로(?)를 경험했습니다. 막국수를 주문한 지 30여 분 만에, 목을 늘어뜨리며 기다리던 막국수를 가져오신 주인아저씨가 “죄송합니다. 장작에 불이 잘 붙질 않아서 늦어졌습니다.”라는 것입니다. 그 가게는 장작불로 음식을 만든다는 것을 광고하는 가게였습니다. 손님도 많지 않고 막국수를 먹는 사람들은 장작불에 만들었는지 아닌지도 모를 텐데,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장작불을 지핀 그 주인아저씨의 정성과 약속을 지키려 하는 모습이 저의 씁쓸한 기분을 달래주었습니다. 금수강산이라는 귀한 선물을 우리는 받았습니다. 그것을 잘 보전하고 지켜가는 것이 그것에 대한 보답이며, 약속일 것입니다. 길은 잘 닦여 있고, 구불거리는 산길은 안전하고 빠르고 쾌적한 터널이 만들어지면서 인적이 드문 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금수강산에는 빼어난 산수만이 있는 것이 아닐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곳에서 보내었던 유년 시절이나 가족들 간의 추억과 기억들 그것이 좋은 것이든지 좋지 않은 것이든지 모두 소중한 것입니다. ‘개발’은 필요하지만, 주변과의 ‘조화’가 분명 지켜져야 합니다. 그것이 환경이든 사람들과의 관계이든 말입니다. 우리는 개발이라는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습니다. 빠른 속도와 높이 때문에 힘들어 하고 현기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생길 것입니다. 문득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함께 타게 되는 사람과 인사라도 나눈다면 엘리베이터에서의 현기증은 사라집니다. 지금 잠시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신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 눈에 보일 것입니다. 비록 몸은 멀리 있다 해도 말입니다. 지금은 여러분들이 있는 곳이 ‘금수강산’임을 알고, 이를 만드신 이와 아름다운 ‘조화’를 이뤄가는 기쁨을 찾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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