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개혁주의 신앙: 구원의 의미(죄의 심판으로부터 자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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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국 목사/로뎀교회 담임

 

구원은 죄와 더불어 죄의 심판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죄란 창조주의 뜻에 어긋나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과 감정과 전 인격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지만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므로 죄에는 반드시 심판이 따른다.

죄의 심판은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셔서 주시는 것도 있지만, 간접적으로 인과율의 법칙을 통해서 사람 스스로 선택하게 하신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자기 삶의 중심에서 몰아내기로 했다고 가정하자. 조물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조물주의 영광을 반사하기 위해서 살지 않고 자기의 영광을 위해 살기로 한다. 하나님이 선과 악의 기준이 아니라 자기 눈에 좋은 대로 선과 악을 나눈다. 이 사람에게 어떤 심판이 임하는가? 먼저 두려움과 공허함과 양심의 가책이 임한다. 그래서 불행하다. 이런 심판은 하나님이 초월적으로 직접 개입하신 심판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인과율의 법칙에 따라 발생한 심판이다.

또 다른 예로 당신이 마음속으로 나쁜 생각을 했다고 가정하자. 이를테면 어떤 물건을 훔치고 싶었다든지, 또는 간음하고 싶었다든지, 또는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했다고 치자. 역시 비슷한 심판이 임한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자기 스스로가 미워지며 화가 나고 두려움이 생기며 불행하다. 때에 따라서는 스트레스를 받고 건강이 악화되고 병에 걸릴 수도 있다. 그리고 얼굴이 추하게 변한다. 더불어 미워하던 마음이 열매를 맺어서 실제로 살인할 경우, 세상 법정을 사용해서 형벌 받게 하신다.

사무엘하(14-18장) 보면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를 대항하여 역모를 일으켰다. 이것은 사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한 죄에 대한 간접적 심판이라고 볼 수 있다. 다윗의 아들 암논이 그의 이복 여동생이자 압살롬의 친동생인 다말을 강간했다(삼하 13장). 그러나 다윗은 이를 바로 잡을 수 없었다. 분명 밧세바와의 사건으로 인해서 자녀를 훈계할 권위가 안 생겼을 것이다. 이에 압살롬은 앙심을 품고 암논을 살해하고 더 나아가 아버지의 위를 탐하여 반역을 일으켰다가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이런 종류의 심판은 인과율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간접적 심판이다.

직접적 심판은 하나님이 초월적으로 개입해서 주시는 심판이다. 번창하던 사업이 갑자기 부도나게 하시고,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병에 들게 하시며, 들짐승이 공격하게도 하시고, 원수가 괴롭히게 하시며, 때로는 죽이신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함으로 아이가 태어났으나 하나님은 이 아이를 데려가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신 심판이다.

이스라엘의 선지자 중에 엘리사란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에게는 게하시라는 사환이 있었는데, 탐심이 있었던 사람이다. 어느 날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한센병을 고치기 위해 엘리사에게 왔다. 엘리사는 그에게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잠그라고 했고, 나아만이 그대로 실행하니, 그의 병이 나았다. 이에 감격한 나아만은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고 막대한 예물을 엘리사에게 주려고 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그러나 엘리사의 사환은 조국으로 돌아가는 나아만의 뒤를 쫓아와서 거짓말을 하여 예물을 착복했다. 그러자 나아만에게 임했던 한센병이 게하시에게 전가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신 심판이다.

신약에 와서 사도행전(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나온다. 이 둘은 부부다. 당시 초대 교회가 물건을 서로 나누는 은혜에 임하게 되자, 이들도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소유를 팔아 사도들 앞에 가지고 왔다. 베드로가 이것이 전부냐고 물을 때에 그렇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 결과 그들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하나님이 초월적으로 직접 개입하신 심판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신 초월적인 심판이 있다. 구원은 이생에서 이러한 직·간접적 심판으로부터 면제받는다. 이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구원은 일차적으로 죄로부터의 탈출, 즉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기에 죄가 없는 삶을 말한다. 죄가 없기에 죄의 심판이 있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