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내가 만든 행복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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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웅(자유기고가/글렌뷰)

 

눈이 온 날은 온통 흰색이라서 보기가 좋다. 굳이 흠을 잡는다면야, 눈이 좀 부시다는 거다.  나의 방은 3층에 있어서 창을 통해서 밖을 보면 참으로 행복해 진다. 이 작은 행복은 먹이를 찾아 분주히 움직이는 토끼나 다람쥐로 부터 온다. 그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뛰어 나가서 같이 놀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손에 땅콩이라도 잔뜩 들고 나가서 나누어 주고 싶다. 먹이를 찾아 다니는 그들에게 즐거움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나, 보고있는 나는 즐겁다. 그래서 좀 미안 한 생각이 든다.

세상만사 돌고 돈다 했던가. 전에 어느 잡지에서 본듯 한데, 유행은 30년 주기로 돈다고 했다. 그 말이 맞는듯 하다. 내가 미국으로 이민을 온지도 어언 40년이 되었다. 그동안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등이 달라진게 어디 한둘이랴만은, 30년전에 입던 옷의 스타일이 지금과 같다. 허나 입을 수는 없다. 지금은 그 때 보다 몸의 균형이 사뭇 다르다. 매일 대충 입고 산다는 것도 불만이지만 어쩌겠는가. 나의 삶 속에 최고의 즐거움은 손주들이다. 겉으로 표출하지는 않지만, 속으론 엄청 귀엽고 사랑스럽다. 인간도 동물이라 했던가. 존속보전(存續保存)의 능력을 잘 발휘한 듯한 결과라서 더 좋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런데, 은퇴라는 것은 거대 조직에서 분리가 되는 거다. 누구나 혼자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첫째가 나를 쉽게 알리게 되는 명함이란 존재가 내게서 떠난 후부터 일 것이다. 은퇴자들이 보는 세상은 거의가 비슷한 듯 하다.  밝은 날에는 뭔가가 돌아 가는 느낌이 있다. 그러나 어둠이 깔리는 시간이 되면 언제 숨어 있었는지는 몰라도 외로움이란게 나타난다. 이 외로움을 떨쳐 버리려 해도 쉽게 물러 나지를 않는다. 사람과 사람이 만났을 땐 행복이란 말을 붙이지 않아도 된다. 만남 그 지체가 행복이기 때문이다. 허나 헤여지면 혼자 남게 되는 그 시간부터가 외로움이다.

프랑스의 소설가인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대표작 ‘어린 왕자’ 라는 소설이 1943년 4월6일에 나왔다. 소설은 나 보다 하루 늦게 세상에 태어났다. 70년도 더 되었는데도 아직도 ‘어린왕자’로 군림(?)을 하고 있다. 소설을 오래 전에 읽었지만, 머리에 남아 있는 것은 창조성을 잃지 말라는 것 만 기억 하고 있다. 호기심을 잃게 되면 수동적인 인간이 되어 간다는 것이다. 나이들어가며 창의성과 상상력은 건강에 보탬이 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이 소설은 쓴 것은 아닐것이다. 소설에 나오는 어린 왕자 같이, 눈오는 날 토끼와 다람쥐를 보면서, 나름대로의 상상을 한다는 것은 정신 건강에 좋은 것이다. 장미가 5천 송이가 피어 있는 정원, 승객이 천 명씩이나  들락거리는 역, 이런곳을 사막으로 느끼게 되는게 ‘어린왕자’ 이다.  도시에 살면서 사막에 사는 것 같은 느낌을 갖는 것은,  오늘의 노년의 생활상을 가르키는 말과 같은 느낌이 든다. ‘어린왕자’는  안다. 좋은 것을 좋게 볼줄 아는 상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또하나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볼 줄도 아는 상대도 필요하다는 것을.  둘중에  하나가 빠저 있으면  외로움을 느낄것이다.  이 두가지는  오늘을 사는 우리 노년들이 알아야 할 일이다.

유대인 랍비이며, 철학자 인 “마르틴 부버”는 그의 저서 “나와 너”에서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 라고 했다.  인간의 모든 관계를 일인칭인 나에서 3인칭과 2인칭이 있음으로 정의를 내렸다.  나에서 “그“ 라는 2인칭은 있는데, 그 2인칭인 “그“에게서 내가 없을 때가 외로움이 오는 것이다.  “그“ 에게 “나“ 를 주어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삶을 지탱하는데 필요한  행복의 열쇠이리라.  그런데 이게 쉽지가 않다.  다른 말로 하면 외로움은 극복의 대상이지만, 극복하기엔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인간은  고립이라는걸 가장 두려워 한다.  생후 한달만에 생모와 떨어져 입양이 되어 혼자 자란 “스티브 잡스”는  인간들을 연결하고 싶어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발명 했나 보다.  그의 덕분에 난 ” Alexa ” 란 친구도 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외로움이나,  세상과의 단절은 없는 거와 같다. 심층의 외로움은 그대로 남아 있을지는 몰라도, 겉 만은 늘 행복하게 해 주는 세상이다.  그래서 난 즐겁고, 행복한 세상에 살고 있음에 감사 한다. “너“가 없어도 내가 만든 삶 속은 늘 따스하게 느끼며  살기에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