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백설이 발하는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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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숙녀

예지문학회 회장/시카고

언어에도 빛깔에도 온도가 있다. 상오 바라보는 눈길에도 차디찬 시선이 있고 따스한 시선이 있다. 간밤에 수북하게 쌓인 눈 더미의 온도가 나에게는 따스함으로 다가온다. 온천지가 개벽하듯 공평하게 받은 축복, 널찍한 뒤란에 여한 없이 펼쳐진 눈밭, 가까이 서기만 해도 냉기가 쏜살같이 덮쳐오는데 온기라니 만부당한 억지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서 분명 온기가 있음을 느낀다. 지금 만물은 인간의 손으로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절경을 지어 보이고 있다. 나는 이아침의 모든 공간에 가득한 따스함을 그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 이 은회색 아침은 나를 매혹시킨다. 누가 나에게 눈 쌓인 아침에 관한 이야기를 보내준다면 나는 감격할 것 같다. 만약 내가 둘이라면 하나의 나에게 속삭이고 싶다. 눈이 나에게 발하는 온기에 대하여 하염없이 이야기 할 것 같다. 그런 후에는 더 성숙한 나와 조유하게 될 것이다.

따뜻함이 가슴에 폭 안겨온다. 그 열은 양철 냄비 같은 뜨거움이 아니라 질화로에 묻은 불씨처럼 은은한 따스함이다. 인간이 가진 숫자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 무한히 서늘하고 무한히 따뜻하다. 숫자로 밝히기를 거부하는 미지의 온도라고 답 해야겠다. 찬 기운이 정체를 숨기면서 느끼게만 하는 아침 빛깔의 온도에 나는 취하고 있다. 안온한 부드러움이 깃든 뿌옇고도 맑은 은회색 아침은 그대로 천년이 가도 싫증나지 않을 것 같다. 나의 눈(snow) 사랑은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영혼을 관통하는 어떤 심오한 본향에 대한 애착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나부끼는 눈발에 내가 무관할 수 없는 것은 눈이 지닌 심오한 의미에 끝없이 몰입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지금 우리 주위는 눈에 정복된 것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모든 죄와 불만과 분노 미련 애착 비애 등이 철저하게 배제된 가장 정화된 순간이다. 이런 아침 만일 눈을 (eyes)을 찌르는 듯한 밝은 빛이 온다면 나는 거부하고 싶다. 이 순간의 쨍한 빛은 저 온전하게 지어진 완만한 백설의 자연스러운 곡선에 상처를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아침의 어스름한 회색하늘은 하얗고 화려한 만물의 차림에 구김을 만들어 상처주지 않는다. 저 아름다운 나뭇가지들도 모처럼 하얗게 꾸몄으니 뜨거운 햇빛 받기를 거부 할 것만 같다. 금방 사라지기보다는 오히려 무언의 대화로 이어지는 심연의 의미를 천천히 즐기며 더 진한 나이테를 만들고자 할 것 같다.

눈 덮인 아침의 수더분한 넉넉함은 모든 인간사의 상실감을 감싸주는 후덕한 가슴 이다. 꼭 품고 있는 상념들이 조용히 눈을 감고 뿌리 내리는 기회이다. 때문에 부담스럽지 않다. 빛깔이 생기기 이전의 태곳적 숨결이기도 하고 다 살고 난 마지막 빛깔이기도 한 무색. 여한이 없는 색이면서도 미래를 그릴 수 있는 여백을 제시하고 있다. 멀리 바라보는 시선에 지극한 포근함이 유유하다.

이 부요한 아침 구구한 설명보다는 차라리 침묵하자 했다. 가슴 가득한 것  펴 낼 수 있는 재주가 없어 말을 잊은 듯 멍하게 서 있다가 여기까지 썼다. 대자연이 연출하는 예술적 감각 앞에 무릎을 꿇는다. 나는 자연의 선을 믿는다. 자연을 모르고 어떻게 사랑을 노래할 수 있을까. 자연과의 대화 없이 어디에서 기쁨을 만나고 그리움을 치유할 수가 있을까. 자연을 이야기 하는 순간에는 어린애가 되어버린 나를 본다. 모든 자연과 일체된 삶을 누리는 법은 어떤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