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아둘람 굴, 회복의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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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용 목사
 시카고 기쁨의 교회

 

성경 속 인물인 다윗은 인생 절반을 광야와 들판에서 보냈다. 양을 치는 목자로, 지루한 하루 하루를 보내기 위해 들에서 나무를 보며 노래를 하고, 별을 보며 악기 연주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가 이스라엘이 정교 분리가 되기 전, 종교적인 지명을 통해 왕위를 이어 받을 자가 된다. 그러나 이미 왕이었던 사울은 그를 질투하여 죽이고자 한다. 그래서 다윗은 적국이었던 블레셋, 지금의 팔레스타인으로 추정되는 나라로 망명하듯 도망친다. 그러나 블레셋 왕도 다윗을 두려워 하여 죽이고자 함을 깨닫고 다윗은 미친 사람 행세를 해서 간신히 빠져 나온다(사무엘상 21:12-15). 그러자 다윗은 오갈 데 없는 자가 되어 죽음의 땅, 광야로 도망치고 끝내는 죽은 자들을 장사 지내는 어떤 한 굴로 피신을 하게 되는데, 바로 그곳이 아둘람 굴이라는 곳이다(사무엘상 22:1-2).

이스라엘 땅에서 광야와 굴은 죽음의 장소이다. 중동지방에서 요새처럼 있는 도시를 벗어나면, 쉽게 야생동물로부터 노출이 된다. 낮에는 내리 쬐는 태양을 피할 수 없고, 밤에는 일교차가 심해 추위를 이길 수 없다. 그런 광야로 다윗은 어쩔 수 없이 도망쳐 나오게 된 것이다.

자기 나라와 적국인 블레셋에서도 버림 받아 죽지 못해 살아나 도망쳐 나온 신세가 된 다윗은 이미 죽은 목숨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광야에서도 무덤과 같은 굴로 피신을 한다. 지금 다윗의 상태는 ‘아무 소망이 없음’과 같은 죽음의 상태와 같다. 그러나 그 죽음의 땅, 광야와 굴에서 다윗은 소생하고 회복한다.

문학적인 관점으로 성경을 본다면, 다윗이 자기 고향에서도 죽음을 모면하고 살아 도망치고, 적국으로 망명하려고 하다가 실패해 죽다 살아, 마지막에 죽음의 길인 광야 길을 걸어 죽은 자들이 매장되는 굴로 가는 모습은 다윗의 실패와 종말을 표현한다. 그러나 성경은 바로 그 죽음의 끝자락에서 생명의 회복이 나타남을 보여준다.

성경 사무엘 22장 1절에 보면, 다윗이 죽음의 장소, 아둘람 굴로 갔을 때, 그의 형제와 가족들이 다윗의 소식을 듣고 그에게 달려왔다고 증거한다. 아무 것도 자신을 살릴 수 없고, 더 이상 어떤 관계로도 맺을 수 없는 “죽음”이라는 상태가 왔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그의 피붙이들은 결코 그를 내버리지 않았다. 다윗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고, 나의 기쁨이 다윗의 기쁨이 된다고 여긴 그의 가족이 단숨에 아둘람 굴로 달려와 다윗을 소생시켜 준다.

기독교의 정신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부활 정신이다. 그 부활 정신은 곧 죽었다고 생각하는 그 지점에서 소생의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 중 하나는 사랑을 품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에서 시작한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고, 장사 지낸 지 3일이 되었을 때, 예수를 사랑하고 따르던 여자들이 가장 먼저 죽은 예수의 몸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 무덤에 갔다가, 예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듣게 된다. 이처럼, 죽음은 사랑하는 자의 관계 회복에서 부활로 이어진다.

이 정신은 우리 일상의 삶에서도 적용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죽지 못해 회사를 다니고, 죽지 못해 먹고, 죽지 못해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죽은 자처럼 사는 사람들에게 회복의 가능성은 사랑의 마음으로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며 관계를 맺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바로 다윗은 자신을 향해 사랑을 품고 온 형제와 가족들을 통해 소생하게 된다. 그리고 그 회복의 능력을 바로 굴에서 함께 죽어 있었던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곧 사무엘상 22장 2절에 “환난 당한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에 원통한 자가 다 그(다윗)에게로 모였다”는 증거대로 다윗은 가족들로부터 받은 회복의 힘을 그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사랑과 섬김, 헌신을 받은 다윗은 회복된 자신의 삶을 이제 다른 누군가에게 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일하고 있는 직장과 매일 치고 박고 싸우는 가족, 그리고 늘 다사다난한 세상이 아둘람 굴과 같은 곳이 아닐까 한다. 죽음의 땅과 같고 좇아가면 죽을 것 같은 곳이지만, 오히려 바로 그곳에 소생의 힘이 있고 회복의 능력이 여전히 있는 것이다. 희망은 저 높은 하늘 위에 있지 않다. 가까운 곳, 곧 우리 일상의 공간 속에서 회복을 주는 아둘람 굴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