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역사를 주도하는 정치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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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언 변호사(법무법인 미래/시카고)

문재인 대통령의 올인에 가까운 전례없는 노력, 워싱턴 정통엘리트들과 전혀 다른 논리의 트럼프대통령의 등장, 그리고 선대의 관심사보다는 경제성장을 추구하려는 김정은의 이해가 합쳐저 2018년은 한반도 평화통일의 큰 전기가 되었다. 그러나 바뀐 해의 잔인한 달 4월, 상황은 여전히 녹록치 않다. 2차 북미회담이후 미국주류는 공화와 민주 가릴 것 없이 트럼프의 즉흥성을 비판하며 북한에 대한 불신을 전혀 풀 생각이 없고, 한국에서도 어려운 경제현실과 정권의 실기들로 인해 이례적으로 높았던 문대통령의 지지도를 떨어뜨려 이제 서서히 회의론이 힘을 얻어 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북한에 관한 한, 지난 수십년간 도발과 핵개발, 인권탄압과 테러를 듣고 보아온 우리 다수가, 북한의 김씨 일가와 지배세력은 상종할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최근 시카고평통이 주최한 북미 관계에 대한 미국인 전문가 강연회에 일흔을 넘기신 어르신들이 이례적으로 많이 참석하였다. 식사테이블에서 다들 같은 말씀이다. 북한은 핵을 포기할리가 없다. 그러니 남한이 어줍잖게 이렇게 양보하다가는 핵이 있는 북한에 질질 끌려다닐 것이다. 북한은 고구려다. 남한은 못당한다. 그런데 언제까지 그래야 한단 말인가. 할아버지 때 당한 원한을 집안 내력으로 만들어 되내이면서 손자도 증손자도 5대손도 계속 미워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신뢰라는 것은 인간관계의 전제라고 말하지만 사실 대화와 교류의 선행 없이 신뢰라는 게 만들어 질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약 신뢰가 있어야만 친구가 될 수 있다면 이세상에 친구를 사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북한을 뭐하러 친구로 사귀려고 하는가. 사실 친구는 가려서 사귀어야 한다. 어머니가 어릴적 귀에 박히도록 하신 말씀이다. 생각해 보니, 북한에 관한한 결국 진보와 보수의 차이는 결국 이거다. 북한을 친구로 만들고 싶은가. 그 판단에 당위라는 도덕을 과감히 걷어내면, 결국 인간을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동기가 남는다.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가. 바로 위로 벽을 같이한 집과 친구로 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지난 70년동안 윗집과 원수로 되어 살면서 주변 집들만 이롭게 하는 이 동네의 봉이었다. 삼년간 기둥뿌리 뽑고 다 거덜나도록 싸우는 동안 오른쪽 집은 함바집 차려 두둑히 챙겨 가세를 일으켰고, 두 집이 상대가 밤사이에 쳐들어올까봐 이웃집에서 무기 사며 탕진한 세월이 수십년이 아니던가.

당장 한 나라가 되자는 것도 아니다. 보수정부였던 노태우 대통령때 만들어진 남북기본합의서나 더 과거로 올라가 박정희 대통령때 김일성과 서명한 7.4. 남북공동성명도 모두 그렇게 합의했다. 두 체제가 따로 존재하면서 전쟁의 위협없이 일단 교류하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일성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통일 대박을 얘기했다. 베트남에 삼성전자 공장을 세우는 대신, 우리와 같은 말을 쓰는 똑똑한 북한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면서 윈윈하자는 것이다. 좌나 우나 가릴 것 없이 지배세력이 되면 똑같이 추진한 통일정책이거늘, 왜 문재인의 진지한 노력과 결코 작지 않은 성취는 왜 오늘 이토록 폄훼되는가. 대한민국 국력의 수십분의 일 밖에 되지 않는 북한이 1950년 초여름 일요일 새벽처럼 우리를 침공할 것을 언제까지 염려하여 저들을 주적 삼으며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그 대비를 위해 꽃다운 젊은이들을 2년가까이 총을 들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구한말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주도하지 못한 결과 한반도가 청일, 노일의 전쟁터가 되었고, 우리는 패망한 국가의 백성이 되어야 했다. 한반도에 우리 민족이 역사를 이룬 2천여년을 다 돌아봐도 아마도 가장 큰 성취와 발전을 이루어낸 21세기 초에, 왜 우리는 아직도 패배주의와 끝없는 갈등으로 날밤을 새워야 하는가. 문화의 힘을 무엇보다 소원했던 김구 선생의 문화강국론을 떠올린다.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며 새로운 정치를 위해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