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유리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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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임(위스콘신대 교수/유아교육학 박사)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소중한 ‘유리 상자’를 갖고 산다. 개개인의 유리 상자는 섬세하고 취약하며, 그 크기도 모양도 두께도 다 다르다. 한 여성이 자신의 자폐증에 대해서 매우 슬퍼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마치 투명한 상자 안에 갇혀 있는 느낌이다! 내가 나갈 수도 남이 들어올 수도 없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은 그 누구도 자폐성 장애자가 당하는 수모와 외면들, 지속적인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도 함께 할 수도 없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것은 자폐증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어찌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타인의 장애나 사고/삶의 방식을 존중하자고 ‘말’로 하기는 매우 쉽다. 하지만 말과 ‘행동’이 일치하기는 매우 어렵다. 특히, 사람은 평소 주장하던 가치나 신념에 관계없이 자신의 기분과 상황에 따라 타인을 대하는 방식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이렇게 타인의 생각과 의견, 상태를 무시한 채 벌어지는 현상은 매일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어떤 부모는 일방적으로 자식에게 자신의 세계관과 규율 방식을 관철시키려 한다. 일부 교육가들은 다문화주의를 떠들어대지만 다른 인종의 동료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지고 냉담한 태도를 갖는다. 어떤 종교인들은 자신의 종교만이 옳다면서 상대방에게 믿음을 강요한다. 정치가는 선거철이 되면 온갖 거짓 공략을 내세워 민심과 표를 사고, 당선되면 ‘나 몰라라’ 한다. 투기와 사기를 일삼는 자들은 다른 이들의 불행은 상관없이 자신의 부와 이득을 챙기는데 정신이 없다.

장애아, 자녀, 학생, 일반 시민들은 피해자가 되기 매우 쉬운 상황에 처해 있다. 이에 우리 모두가 적어도 무지에서 비롯되는 무시를 막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진정으로 ‘다문화주의’와 ‘타인 존중 사회’를 이루기를 원한다면 진정한 자아비판(self-criticism)이 앞서야 한다. 이때 감정이입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감정이입 즉 공감 능력은 사회 복지와 정의 사회로 가기 위한 출발점이 된다.

동정과 감정이입은 다르다. 동정은 그저 “어머나, 정말 불쌍하다!”는 감정을 잠깐 느끼고 마는 것이다. 반면에 감정이입은 ‘내 자신이 상대방의 입장에 처한다면 어떨까?’를 심각하게 고민해보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내게 난독증이 있다면 어떻게 읽기를 배웠을까?”, “내가 그토록 폭력적인 집에서 태어나 자랐더라면?”, “내가 어렸을 때 부모에게 버림을 받아 고아원에 갔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무종교주의자라면 어떨까?”, “내가 백인 중심의 지역 사회에서 소수 인종에 속한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가 절친한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고 못 받으면 어떨까?”, “내가 자폐증으로 타인과 의사소통이 너무나 어렵다면 어떨까?”, “상대방이 나에게 욕이나 기분 나쁜 말들을 내뱉는다면 어떨까?”

이 사회는 특별히 인종과 문화를 따지지 않더라도 매우 복잡하고 무한히 다양하다. 인간의 ‘몸’ 자체만 보더라도 얼마나 미지의 세계인가? “무지가 오해를 낳는다.” 따라서 오해를 이해의 방향으로 매끄럽게 회전시키려면, 타인의 생각과 처지를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타인에게 무엇을 강요하거나 함부로 상대방의 상황을 추정하기 전에 우리가 자아 중심으로 사고를 하지 않도록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돌아볼 일이다. 그래야 타인의 ‘유리 상자’ 안에 들어가지는 못해도 깨지지 않도록 조심할 수가 있다. 일단 작게 시작하자! 우선 이메일을 보낼 때 적어도 상대방의 이름이라도 정확하게 쓰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