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착각과 자아도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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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봉(상록회장/시카고)

인류가 세상을 지배하면서 기록된 역사는 착각과 자아도취의 산물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개인은 물론 공의에 의한 판단까지 집단이기의 산물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는 하느님의 계시 혹은 영감으로 씌어졌다고 믿는 성경까지도 예외라 할 수가 없다. 성경 기사에게 주어진 영감이나 계시란, 믿음 외에 증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불신하는 사람이나 상대적 반론을 제시하는 사람이 그치질 않는다. 그리고 믿음이란 그 자체가 착각이거나 자아도취를 넘어 오만(傲慢)일 때도 보인다. 그 오만이 사람이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다는 착각이고 그렇게 가르치는 오류이다. 설사 하느님이 사람을 통해 영광을 취하신다 해도 그렇다고 사람이 단정을 하게 되면 사람의 생각으로 사람이 하느님을 판단하는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영광은 하느님 스스로 창조하시고 스스로 누리실 뿐, 객관적인 존재에 연관되지 않는 절대적 존엄으로 형성된 가치이다. 다시 생각해봐도 사람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다는 생각은 하느님의 전능과 전지를 침범하는 가상치 않는 사고(思考)의 오류이다. 사람은 하느님의 은혜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을 통한 구원의 은총을 힘입어 사람이 하느님이 베푸신 영광을 누리며 찬양을 드릴 뿐이다. 그리고 복음이란 이 엄청난 지식을 세상에 알리는 소리가 복된 소리 곧 복음(福音)이다. 다시 말해 사람의 능력으로 하느님의 영광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판단은 그리스도를 믿는 본질이 훼손된 믿음 불신앙이다.

사람은 하느님을 찬양할 뿐이다. 찬양은 곧 감사의 표현으로 순종을 의미하는 것이지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대가를 돌려드리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목자들은 흔히들 하느님께 영광 을 돌려드리자고 강조하여 권면한다. 하느님의 은혜(恩惠)는 하느님이 베푸시는 오직 일방적 은총(恩寵)이다. 만약 사람이 대가를 셈할 수 있다면 일방적인 은혜가 아니다. 또 하느님께 사람의 행위로 영광을 돌리고 돌릴 수 있다는 생각이 사람의 교만이요, 현대교회의 일그러진 흉상이다. 한국 교계에서나 미국 이민 교회에서고 대형교회가 법정시비, 혹은 세대교체 시 교회를 아들 목사에게 상속하려한데 대해 자유로운 교회가 얼마나 많은지 헤아려 봄직하다.
심지어 목사가 세상법정에서 유죄를 선고, 확정 받고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회개와 용서’란 묘한 정신병 바이러스에 감염 탓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볼 숙제다. 용서는 내가 나를 용서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회개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이 용서해 주셨다면 증거도 하느님이 주신다. 하느님께 회개했다면 회개의 응답을 하느님이 증거로 주실 것이다. 그 증거들은 객관적이라 누가 보아도 믿음이 생기도록 하느님의 역사하심이다.

회개와 용서란 정신병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은 일주일 내내 생활공간에서 죄를 지어 죄에 범벅이 되다가, 주일날이 되면 예배에 참석하여 통성기도 시간이 오면 가장 큰소리로 주여 삼창에서 시작하여 눈물콧물 좀 흘리고 나면 은혜를 풍성하게 받아 스스로 새사람이 된다. 기도도 훈련이고 타성이며 눈물콧물 흘리는 것도 훈련에서 시작하여 타성에 진입했다. 은혜를 받고 누리는 것은 ‘주여’ 삼창이 중독증상이다.

여기다 더하여 많은 신자들이 목사를 섬기다 하느님을 잃어버린다. 그 결과 목사가 결원 된 교회에서 목사를 초빙하기 위해 목자를 찾기를 주님을 찾듯 찾지만 화려한 주님은 어디에 없다는 사실을 신도들은 모른다. 너희 중에 가난한 사람, 너희 중에 헐벗은 사람, 너희 중에 보잘것 없는 무능한 사람을 통해 전능을 부어주시는 하느님을 보았으면 좋겠다.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는 헌신의 대상을 공유하는 교회다. 하느님이 보여주신 헌신을 솔선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리고 집사나 장로 혹은 권사라는 직분은 하느님이 지워주신 자기 십자가다. 벼슬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십자가를 지고 가겠다고 자청하는 현상은 나쁘지 않은 모습이지만 지워주지 않는다고 교회를 떠나는 행태는 불신앙의 표본이다. 결과는 언제나 하느님이 주관하신 열매이기에 불순종은 불신앙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을 흔하게 봄이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