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성경상식] 지금은 명품 브랜드 옷을 다시 꺼내 입을 때

1592

유승원 목사(시카고언약장로교회 담임)

인종 문제가 우리 속을 뒤집어 놓는다. 우리 한인들은 이 땅의 인종 차별 서열의 피라미드에서 맨 아래 놓여있음을 새삼 다시 느낀다. 백인에게 당했다고 생각하는 Afro-American의 분풀이는 28년 전 LA 폭동 때와 똑같이 애꿎은 우리 동포들의 사업장을 향했다. 울분이 치솟아도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정작 못하는 벙어리 냉가슴 앓기다.

이런 때는 내가 믿는 예수님이 참 고맙다. 그 먼 옛날 2천년 전에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혁명적 선언을 다시 가슴에 새길 수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방인)이나 종(노예)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이것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내용이었다.

한 유대 랍비 문헌에서 주후 150년경 에후다는 이렇게 주장했다. “(유대) 사람은 매일 찬양의 기도 셋을 암송해야 한다. ‘나를 이방인으로 만들지 않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지어다’. ‘나를 여자로 만들지 않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지어다’. ‘나를 무지랭이(노예)로 만들지 않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지어다’”(Tosephta Berakhot 7.18). 우리 귀에는 경악할 정도의 뻔뻔스러운 발언이었지만 당시 유대인들 중 이것을 문제 삼을 사람은 없을 만큼 당연한 통념(通念)이었다. 인간은 유대인-비유대인, 남자-여자, 노예-자유인, 세 종류의 구별선으로 또렷하게 나눠져 있었다.

당시 세계 지성(知性)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도 그의 저서 <윤리학>에서 “노예는 생명 있는 연장이며 연장은 생명 없는 노예”라며 천연덕스럽게 이런 차별을 도덕으로 여겼던 시절이었으니까… 지금은 붕괴되어 존재하지 않는 예루살렘 성전의 ‘이스라엘의 뜰’과 ‘이방인의 뜰’은 성인의 가슴 높이 정도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그 사이 놓여있던 비문(유대고대사 15.11.5, 유대전쟁사 5.5.2) 하나가 1871년 발굴되었다. 섬뜩한 경고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다른 종족의 누구도 이 울타리를 넘어 성전의 이 영역 안에 들어오지 못한다. 이를 범해 붙잡히는 사람은 그로 말미암을 죽음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무서운 인종 차별이다.

예수님은 그 살벌한 시대에 그 차별의 담을 완전히 허무셨다. 그래서 신약 성경은 노래한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엡 2:14-15). 사도 바울은, 겉 모습과 빛깔을 완전히 가리고 똑같은 옷을 입는 이미지를 그려줬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피부 색이 그리스도 브랜드의 고급 옷으로 가려진다. 그리스도 유니코드 옷이 계급과 신분, 성별도 다 덮어버린다. 힘들지만 실속 없는 울분을 내려놓고 다시 옷을 꺼내 입는다. 명품 중의 명품으로… 최고의 브랜드, ‘그리스도’라는 옷이다. 피부 색으로 방황하지 말고 모두 이 옷을 입고 거리로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