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성경상식 55] 맞는 말이 쓸데없는 말이 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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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원 목사(시카고언약장로교회 담임)

한 때 용기를 주는 최고의 격려였기 때문에 사업을 시작하는 신앙인들의 업소에 가장 많이 걸려 있던 성구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 사람들이 암송하고 좋아하던 이 구절이 요즘은 듬성듬성 하더니 이제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는 것 같다. 이 성구에 담긴 성공 욕구의 투사(投射)로서 ‘예수 믿으면 무조건 잘 된다’는 기복주의와 번영신학에 대한 비판이 날 서게 강력했고 무엇보다 이 성구의 문장이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그 잘못된 신학으로 하나님께 꾸중을 듣게 된 욥의 세 친구 중 하나인 빌닷의 발언인 것을 다들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유명한 문구를 격려와 기도에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될 이유는 전혀 없다. 좋은 기도다. 축복의 희원으로 아름답다. 믿음 안에서 사는 사람들을 향해 틀린 말도 아니다. 사실은 그렇다. 욥기를 자세히 읽어보라. 욥기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욥의 세 친구의 설교에는 그다지 오류가 없다. 하나님의 꾸중을 들었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객관적으로 읽어보면 그 주장의 내용들은 다 성경 어딘가에 있는 하나님 말씀들이다. 그들의 신학과 고백과 권면은 어김없이 성경적이며 하나님의 가르침이며 그래서 신앙적으로 틀리지 않는다. 다 맞는 말들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욥 42:7)고 했을까? 그래서 그들은 욥에게 가서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께 번제를 올려야 했다(42:8).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주장 자체가 잘못됐다고 논박하거나 수정하신 것도 아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 말이 ‘옳다’고 정의한 욥을 먼저 꾸중하셨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욥 38:2) 하시면서 38-41장에 걸쳐 길게 하나님의 주권과 신비에 대해 설파했고 욥은 그 엄중한 말씀 앞에서 회개해야만 했다. 욥의 말을 옳다고 하면서도 그의 자세를 꾸중한 것이다. 그래서 욥이 고백했다.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3).
그렇다. 세 친구의 장황한 인과응보의 신학은 다 맞는 말이지만 가려진 커튼 뒤의 신비 속 실상이 있는 욥 개인의 고난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잡소리’들이었다. 맞는 말이 다 맞지 않는다. 오히려 고난이라는 신비 앞에서는 맞는 말일수록 더 틀린 말일 수 있다. 그들은 맞는 말로 쓸데없는 말을 한 것이다. 그들의 맞는 말은 욥을 자극하여, 그로 하여금 ‘맞지만 틀린’ 말을 쏟아내게 만들어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 같이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되게 일을 벌여 놓았다.
세상이 아프고 힘들다. 인간 세상의 속 상하는 고난 앞에서 너무 말이 많으면 안 된다. 더구나 가슴 찢는 고난 앞에서 신학적으로 옳다고 자부하며 입 바른 맞는 말을 쏟아내는 것은 많이 추하고 악하기까지 하다. 고난 앞에서 우리 가 할 일은… 여전히 하나님께 경배하며(욥 1:20-22) 아플수록 더욱 서로 사랑하는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