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김의 영화세상] 걸어도 걸어도 ( Still Walking 2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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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 김(영화 칼럼니스트)

일본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의 작품들을 좋아한다. 특히 현대 사회의 부조리와 가족의 민낯을 담담하게 다루면서 사랑하지만 상처주고 미워하고 떠난 후에 후회하고 그리워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솔직하고 따뜻하게 보여준다. 그의 2008년작 “Still Walking”은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평단과 관객의 호평을 받았는데 일본어 제목인 “아루이테모 아루이테모(걸어도 걸어도)”는 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였던 일본 노래 “블루라이트 요코하마”에 나오는 가사이다.

그해 여름, ‘료타’는 아내 ‘유카리’와 의붓 아들 ‘아츠시’와 함께 부모님이 계신 요코하마의 고향 집을 찾아간다. 료타와 누나 ‘치나에’는 해마다 죽은 장남 ‘준페이’의 기일에 부모님 집에 모인다. 미술품 복원사인 료타는 전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아들을 키우는 유카리와 얼마 전에 결혼했다.

형 준페이는 부모님의 자랑이었는데 15년전 바다에서 물에 빠진 소년을 구하고 익사했다. 은퇴한 의사인 아버지는 자신의 뒤를 이을 장남이 죽고,

과부와 결혼한 별볼일 없는 차남 준페이가 못마땅하다. 출가한 치나에가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도착한다. 어머니는 식구들이 먹을 음식을 장만하고 어머니가 만든 진수성찬으로 온 식구가 점심을 먹는다. 아버지는 무뚝뚝하고 료타의 아내는 시부모 눈치를 보고 의붓 아들 아츠시는 조용히 낯선 식구들을

관찰한다. 어머니는 쉴새없이 옛날 얘기를 한다. 점심식사후 료타는 어머니와 아내 ,아들을 데리고 형 무덤에 간다. 오후에는 준페이가 구해준 청년이 찾아 온다. 해마다 준페이의 기일에 와서 가족들에게 준페이의 희생 덕분에 살아간다고 감사해 하는 일이 그에게는 불편하고 괴롭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년에도 꼭 와달라고 말한다. 이제 그를 놓아주자는 료타에게 아버지는 저런 놈 때문에 아까운 내아들이 죽었다고 하고 어머니는 일년에 하루 정도는 괴로워해야 한다고 싸늘하게 대답한다. 치나에 식구들이 떠나고 어머니는 좋아하는 레코드 판을 틀고 노래를 따라 부른다. 료타가 젖먹이였을 때,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찾아 나섰다가 남편이 젊은 여자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모습을 목격한다. 울면서 집에 오는 길에 그 레코드를 샀다.

그때부터 남편이 불렀던 “블루라이트 요코하마”는 어머니의 애창곡이 되었다. 다음 날 료타네는 도쿄로 떠난다. 몇년 후 여름, 료타는 새로 태어 난 딸과 식구들을 데리고 돌아가신 부모님 묘지를 찾아 고향에 온다.

우리는 소중한 것을 항상 한발 늦게 깨닫곤 한다. 가족들이 저마다 가슴에 품고 있는 비밀과 상처들은 세월이 흘러도 그대로 묻어둔다. 그리고 떠난 뒤에야 비로소 슬퍼하고 후회한다. 영화는 장남의 기일날 모인 가족의 하루를 보여준다. 어머니가 만드는 음식과 빛바랜 옛날 앨범, 어린 시절의 행복하고 천진한 추억들, 마루에 앉아서 찍는 가족 사진등을 통해 죽음과 상실, 분노와 슬픔이 계속되는 삶에서 그래도 가족은 서로를 이어주는 존재임을 말해준다.

소박하고 절제된 집안 내부, 바다가 보이는 준페이 무덤, 길고 한적한 계단과 양산을 쓰고 걷는 어머니와 유카리 모습등이 그리움을 불러 일으킨다.

정감있고 섬세한 촬영과 등장인물들의 앙상블이 뛰어난 수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