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김의 영화세상] 너는 내 운명 ( Blind 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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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 김(영화 칼럼니스트)

북유럽의 겨울을 배경으로 한 가슴저린 사랑 영화가 있다. 요즘같이 암담하고 힘든 때에 무슨 사랑 타령 할수도 있겠지만 현실이 녹록치 않을수록 순수하고 애절한 사랑 이야기에 위로를 받는다.

흰눈으로 뒤덮인 네덜란드의 한적한 마을.  회색의 성같은 거대한 저택이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다. 집안은 언제나 두꺼운 커튼이 쳐있고 어둡고 적막하다.  이 부잣집의 외아들 ‘루벤’은 후천적으로 눈이 안 보인다. 자신을 둘러싼 캄캄한 세상에 절망하고 화가 난 루벤은 우리에 갇힌 들짐승처럼 주변의 물건을 마구 던지고 시중드는 하녀를 물어뜯는다. 어머니는 루벤에게 책을  읽어줄 새로운 고용인을 들인다. 30대 후반의 건장한 체구를 가진 ‘마리’가 도착한다. “알비노”(선천적 색소 결핍증)를 앓는 마리는 머리카락이 백발이고 피부가 하얗다. 얼굴과 손에는 유리조각에 베인 듯한 흉터도 있다. 외모 때문에 마리는 평생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홀로 살았다. 마리는 첫대면에서 난폭하게 구는 루벤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힘으로 제압한다. 철부지 폭군 루벤이 드디어 임자를 만났다.

마리는 정성껏 루벤을 돌본다. 책을 읽어주고 목욕을 시키고 함께 산책을 한다. 루벤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마리에게 사랑을 느낀다.  마리가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을 읽어주면 루벤은

상상속에서 마리의 모습을 그려 본다. 루벤은 마리가 붉은 머리와 초록색 눈을 가진 아름다운 아가씨라고 믿는다.

마리가 어렸을 적에 엄마는 딸의 얼굴이 흉칙하다면서 마리의 머리를  거울에 짓이겼다. 그때 깨진 거울 조각들이 얼굴에

깊은 흉터를 남겼다. 마리는 누군가에게서 아름답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다. 루벤의 사랑과 관심을 받으면서 마리도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게 된다. 아들의 사랑이 못마땅한 어머니는 루벤에게 눈수술을 받게 한다. 루벤은 마리를 볼 수

있다는 희망에 수술에 응하고 마리는 자취를 감춘다. 시력을 되찾은 루벤은 마리가 사라져서 절망한다. 루벤은 마을의 도서관에서 마리와 조우한다. 마리의 체취를 느낀 루벤은 “눈의 여왕” 책을 읽어 달라고 부탁한다. 목소리를 확인한 루벤은 그녀를 붙잡고 마리는

떠난다. 절망한 루벤은 처마 밑 고드름을 따서 두 눈을 찌른다.

비극적인 결말에 마음이 아프다. 잿빛 하늘과 흰눈, 얼음으로 덮인 호수 그리고 겨울 궁전같은 웅장한 루벤의 집. 영화 내내 차갑게 아름다운 풍광이 눈 앞에 펼쳐진다. 소외된 두 영혼이 만나 서로의 상처를 감싸고 사랑하는 과정이 눈물겹다. 사랑은 나로부터 시작한다. 마리가 자신을 사랑했다면 루벤 곁에 남았을까. 두 주연 배우의 연기가 뛰어나다.  빼어난 촬영과 곱고 처연한 음악도 훌륭하다.  코로나 여름에 겨울의 북구로 사랑 여행을 떠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