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김의 영화세상] 누가 셰익스피어를 보았는가 ( Anonymous 2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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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 김(영화 칼럼니스트)

개인적 취향이지만 SF 영화보다 시대극을 좋아한다. 성과 왕족, 음모와 배신이 가득한 궁정, 거기다 화려한 의상은 눈을 즐겁게 한다.

“셰익스피어가 사실은 문맹에다 천박한 배우였고 그의 모든 작품들은 귀족이었던 ‘옥스포드’ 백작이 썼다.” 라고 한다면?  400년 전에 죽은 셰익스피어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겠다. 하지만 영국 영화 ‘Anonymous’를 보면 충분히 타당성이 있다.

‘엘리자베스’ 1세 통치 말기의 영국. 늙은 여왕은 후사가 없다. 차기 영국 왕을 놓고 ‘튜더’가문과 ‘쎄실’가문의 세 겨루기가 한창이다. 귀족들은 사치스럽게 살지만 서민들은 가난하고 힘들다.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오락은 극장에서 연극을 보는 것. 정치와 현실을 풍자한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 웃고 울고 화내고 즐거워한다.

촉망받는 젊은 극작가 ‘벤 존슨’은 성실하고 열정적이다. 하지만 극단 배우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술과 여자를 밝히는 데다 발음도 시원치 않다. 어느 날 벤 존슨은 자신의 연극을 관람한  세력가 ‘에드워드 드 비어’ 백작의 호출을 받는다. 백작은 자신이 써 놓은 각본을 벤에게 건네며 벤의 이름으로 공연을 하라고 지시한다. 백작의 연극은 대성공을 거둔다. 공연 말미 작가의 이름을 묻는 관객들에게 벤은 ‘익명의’ (anonymous)작가 라고 말한다. 에드워드 백작은 계속해서 자기의 작품을 벤에게 전해 주고 연극은 흥행을 이어 간다. 양심적인 벤이 작품에 자신의 이름을 대신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는 사이 교활한 배우 윌리엄은 자기가 그 작가라고 발표한다. 그 때부터 백작의 모든 걸작품들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진다.

여기서 영화는 과거로 돌아간다. 에드워드 백작은 어릴 때부터 예술과 문학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인다. 에드워드가 십대였을 때 젊은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자신이 쓴 ‘한 여름 밤의 꿈’을 연기로 보여준다. 여왕은 감성이 풍부한 미소년에게 호감을 가진다. 아버지가 죽고 여왕의 측근인 쎄실 백작이 에드워드의 후견인이 된다. 에드워드는 글쓰기를 계속하다가 쎄실 백작의 반대에 부딪히고 그의 딸과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한다.

에드워드는 엘리자베스 여왕과 재회를 하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여왕이 임신을 하자 쎄실 백작은 여왕을 시골로 보내 둘 사이를 갈라놓는다. 여왕이 자기를 버렸다고 오해한 에드워드는 홧김에 궁중의 시녀와 관계를 맺고 출산 후 돌아 온 여왕은 에드워드의 배신에 분노한다. 나중에야 여왕이 자신의 아들을 낳은 걸 알게 된 에드워드는 쎄실의 요구대로 부인에게 돌아간다. 여왕과 에드워드의 아들은 ‘사우스햄튼’ 백작 집안의 아들로 키워진다.

불행한 결혼 생활 내내 에드워드는 계속해서 희곡과 시와 소네트를 쓴다. 귀족들의 연애, 배신, 질투, 탐욕등을 까발리고 그들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작품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할 수 없어서 묻어 두었다. 그리고 벤 존슨을 통해 세상에 내놓는다.

에드워드는 영국의 차기 왕이 자질을 갖춘 ‘에섹스’ 백작이 되기를 바란다. 장성한 그의 아들도 에섹스 백작을 돕는다. 쎄실은 음모를 꾸미고 에섹스 백작은 반란의 우두머리로 몰려 처형당한다. 에드워드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여왕을 찾아가 선처를 부탁한다. 아들은 풀려나고 엘리자베스 여왕도 죽고 영국은 새 왕을 맞는다. 벤 존슨은 죽음을 앞둔 에드워드를 만나서 그의 마지막 작품을 전해받는다.

천재적 문필가 에드워드 백작과 사기꾼 셰익스피어라니 당돌하지만 설득력이 있다. 16세기 영국 왕실과 런던의 묘사가 세밀하다. 여왕과 대신들의 의상은 박물관의 그림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고풍스럽고 진흙창 거리, 사람들로 북적대는 시장통, 연극이 상연되는 극장, 회색의 성 등그 시대의 배경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셰익스피어 작품의 하일라이트를 영화 속 연극 무대에서 감상하는 것은 덤이다. 배우들의 앙상블도 훌륭하다. 타고난 재능과 귀족임에도 불행했던 에드워드와 셰익스피어만 아니었으면 당대 최고의 극작가였을 벤 존슨의 대비가  흥미롭다. 무식하고 뻔뻔한 셰익스피어는 거짓말 한 번으로 돈과 명성을 얻고 죽어서도 전설이 된다. (말이 된다.)  촬영 음악 편집 미술등이 뛰어나다.

영화 ‘아마데우스’를 생각나게 하는 수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