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 김의 영화세상] 너는 내 운명 (Blind  2007)

1658

joy kim

조이 김
   영화 칼럼니스트/시카고

 

아침 저녁 제법 차가워진 공기를 들이마시며 이제 겨울이구나 실감합니다. 북유럽의 겨울을 배경으로 한 가슴저린 사랑 영화가 있습니다. 살기도 바쁜데 무슨 사랑 타령 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이 녹록치 않을수록 순수하고 애절한 사랑 이야기에 목말라하고 위로받는 우리들 아닙니까.

흰눈으로 뒤덮인 네덜란드의 한적한 마을. 회색의 성같은 거대한 저택이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집안은 언제나 두꺼운 커튼이 쳐있고 어둡고 적막합니다.

이 부잣집의 외아들 ‘루벤’은 후천적으로 눈이 안 보입니다. 자신을 둘러싼 캄캄한 세상에 절망하고 화가 난 ‘루벤’은 마치 우리에 갇힌 들짐승처럼 주변의 물건을 마구 던지고 시중드는 하녀를 물어뜯습니다.

아들에게 헌신적인 어머니는 ‘루벤’에게 책을  읽어줄 새로운 고용인을 들입니다. 30대 후반의 건장한 체구를 가진 ‘마리’가 도착합니다. “알비노”(선천적 색소 결핍증)를 앓는 ‘마리’는 머리카락이 백발이고 피부가 하얗습니다. 얼굴과 손에는 유리조각에 베인듯 한 흉터도 있습니다. 천형같은 자신의 외모 때문에 ‘마리’는 평생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홀로 살아 왔습니다.

‘마리’는 첫대면에서 난폭하게 구는 ‘루벤’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힘으로 제압합니다. 앞을 못 보는 철부지 폭군 ‘루벤’이 드디어 임자를 만났습니다. ‘마리’는 성실하고 참을성 있게 ‘루벤’을 보살핍니다. 책을 읽어주고 목욕을 시키고 함께 산책을 합니다.

‘루벤’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마리’에게 사랑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마리’가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을 읽어주면 ‘루벤’은 상상 속에서 ‘마리’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루벤’은 ‘마리’가 붉은 머리와 초록색 눈을 가진 아름다운 아가씨라고 믿습니다.

‘마리’가 어렸을 적에 엄마는 딸의 얼굴이 흉칙하다면서 ‘마리’의 머리를  거울에 짓이겼습니다. 그때 깨진 거울 조각들이 얼굴에 깊은 흉터를 남겼습니다.

‘마리’는 평생 누군가에게서 아름답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늘 얼굴을 감추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외롭게 살아왔습니다. 앞 못 보는 ‘루벤’의 일상을 함께 하면서 ‘루벤’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 것이 처음에는 불편하고 당혹스러웠지만 ‘마리’도 진심으로 ‘루벤’을 사랑하게 됩니다.

두 사람의 사랑이 못마땅한 어머니는 의사의 권고로 ‘루벤’의 눈수술을 감행합니다. ‘루벤’은 삶의 기쁨이 되어 준 ‘마리’를 볼수 있다는 희망에 수술에 응하고 ‘마리’는 두려움에 자취를 감춥니다.

시력을 되찾은 ‘루벤’은 ‘마리’를 찾지만 그녀의 흔적이 없습니다. 절망속에서 괴로워하던 ‘루벤’은 마을의 도서관에 갔다가 ‘마리’와 부딪힙니다. 못생긴 ‘마리’를 처음에는 몰라보지만 그녀의 체취를 맡고 직감적으로 “눈의 여왕” 책을 읽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운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마리’에게 같이 돌아가자고 애원합니다. ‘마리’는 현실은 동화가 아니라고 말하고 사라집니다.

홀로 남은 ‘루벤’은 처마 밑 고드름을 따서 두 눈을 찌릅니다.

 

잿빛 하늘, 흰눈, 얼음으로 덮인 겨울 호수 그리고 “눈의 여왕” 궁전 같이 쓸쓸하고 웅장한 ‘루벤’의 집. 그림같은 화면이 섬세하고 환상적입니다. 마지막 결말이 가슴아프고 충격적입니다. ‘루벤’의 절망에 공감합니다. 철저하게 소외된 두 영혼이 만나서 서로의 상처를 감싸고 사랑하게 되는 과정이 눈물겹게 아름답고 사실적입니다.

상대방의 가장 추하고 약하고 아픈  모습조차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리’가 자신을 사랑했다면 ‘루벤’의 사랑도 받아들였을테니까요. 안타까운 여운이 오래 남습니다. 배우들의 연기가 뛰어나고, 곱고 처연한 음악도 심금을 울립니다.  겨울 동화같은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