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 김의 영화세상] 베니스의 여인 : Bread and Tulips(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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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 김
 <영화칼럼니스트/시카고>

 

엊그제 입춘이 지났습니다. 시카고는 아직도 춥고 회색인 겨울입니다.  봄을 기다리면서 밝고 화사한 이태리의 베니스로 떠나보면 어떻겠습니까.

이태리 ‘페스카라’에 사는 중년의 주부 ‘로살바’는 식구들과 함께 유적지 관광을 갑니다. 돌아오는 고속도로 휴게실의 화장실에서 귀걸이를 변기에 떨어뜨립니다. 겨우 꺼내서 밖으로 나오니 관광 버스는 그녀를  놔둔 채 떠났습니다. 홀로 남겨진 로살바는 어이가 없습니다. 남편과 틴에이저인 두 아들은 엄마가 없어진 것도 모르나 봅니다.

두 시간이 지나서야 남편이 휴게실로 전화를 했습니다.  오히려 화를 내면서 데리러 갈 테니 꼼짝말고 있으랍니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로살바는 모르는 사람의 차를 얻어타고, 집이 있는 페스카라를 지나쳐 베니스까지 갑니다.

일찍 결혼해서 아이들 키우고 살림만 해 온 그녀는 베니스가 처음입니다. 로살바는 낭만적이고 색깔있는 도시의 풍광에 즉시 매료됩니다.  그 날 저녁 역 근처의 작은 레스토랑에 갔습니다.  점잖은 웨이터는 요리사가 아파서 차가운 요리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소박한 음식을 왕후의 만찬처럼 정성껏 접시에 담아 냅니다.

다음 날 로살바는 시내를 구경하다가 집으로 가는 기차를 놓칩니다. 같은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돈이 모자라 하루 밤 잘 곳이 필요하다고 사정을 얘기합니다.  친절한 웨이터 ‘페르난도’는 로살바를 자신의 아파트 거실에서 재우고 아침까지 차려줍니다.  이틑날 로살바는 거리의 꽃집에서 사람 구하는 광고를 봅니다.

그녀는 무뚝뚝한 꽃집 주인 영감을 설득해서 취직을 합니다. 그리고 페르난도가 사는 아파트에 방을 얻습니다.  식구들에게는 잘 있으니 걱정 말라는 전화 메세지만 남깁니다.  로살바는 처음으로 아내와 엄마의 신분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살아갑니다. 베니스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친구가 됩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맛사지사인 ’그라치아’는 수다스럽고 단순한 여자입니다. 남자들에게 번번이 이용만 당하는 그녀는 아직도 진실한 사랑을 꿈꿉니다. 로살바는 그라치아를 동생처럼 보살핍니다. 고독하고 품위있는 중년 남자 페르난도는  로살바를 만나기 전까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로살바의 따뜻하고 다정한 성품이 자신의 메마른 일상에 큰 위로가 되면서 삶에 대한 애착을 갖게 됩니다. 낙천적인 로살바는 괴팍한 꽃집 영감의 마음도 녹입니다. 특히 그녀가 아코디온을 연주하면 꽃집에 밝은 기운이 넘칩니다.  로살바는 베니스에서 새로운 삶을 살면서 잊고있던 자신을 서서히 찾아갑니다.

한편 주부가 없어진 로살바의 집은 엉망입니다. 그동안 로살바의 수고와 헌신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조금도 고마워하지 않던 식구들은, 쌓이는 빨래, 사먹어야 하는 음식, 어질러진 집안이 불편할 뿐입니다.

로살바 몰래 오랫동안 바람을 피워왔던 남편은 애인에게 집안일을 부탁했다가 거절당합니다. 아내의 부재가 힘들어진 남편은 결국 사설 탐정을 고용해 베니스로 파견합니다.  뚱뚱하고 어설픈 탐정  ’코스탄티노’는 원래 배관공입니다.  그는 로살바를 발견하고 뒤를 따릅니다.  로살바의 아파트 앞까지 와서 서성이다가 그라치아를 만납니다. 그라치아는 맛사지 손님인 줄 알고 자기 방으로 데려가서 맛사지를 해 줍니다. 코스탄티노는 집안의 모든 고장난 곳을 고쳐줍니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고 코스탄티노는 로살바를 찾지 못했다고 보고합니다. 그라치아와 코스탄티노는 함께 가정을 꾸립니다.

로살바는 예의 바르고 상냥한 웨이터 페르난도가 점점 좋아집니다. 하지만 남편에게서 아들이 위험하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페르난도에게 편지와 튤립 꽃다발을 남깁니다. 집에 오니 아들은 멀쩡합니다. 집안이 다시 정리되고 맛있는 음식이 식탁에 올려지지만 식구들은 여전히 로살바를 존중하지 않습니다. 생활이 예전처럼 편해졌을 뿐입니다.

로살바가 떠나고  베니스의 사람들은 어쩐지 삶에 활력이 없습니다. 특히 페르난도는 튤립의 마지막 꽃잎이 떨어지도록 로살바를 그리워 합니다. 그녀 없는 삶은 무의미합니다. 그라치아와 코스탄티노는 꽃집 영감의 밴을 빌립니다.  페르난도를 태우고 로살바를 찾아갑니다.  수퍼마켓 파킹장에서 페르난도는 로살바에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로살바는 아들까지 데리고 베니스로 돌아갑니다. 밤에 야외에서 파티가 열리고 로살바의 아코디온 연주에 맞춰서 페르난도가 멋지게 노래를 부릅니다. 모두가 즐겁게 춤을 춥니다. 진정한 인생 2막을 시작한 로살바는 날씬하지도 세련된 용모도 아닙니다.  뚱뚱하고 촌스러운 무늬의 옷만 입습니다. 그래도 그녀는 눈부십니다. 사랑과 희생으로 성실하게  살아 온 중년 여자의 기품과 아름다움이 자연스럽습니다.

베니스의 모습은 아주 정겹습니다. 낡은 아파트, 오래된 길거리, 빨랫줄에 널려있는 형형색색의 빨래들, 저녁 무렵의 푸르스름한 골목길. 영화 전체가 베니스라는 캔버스에 그려진  유화 같습니다. 풍부한 색감이 눈을 즐겁게 하고 아코디온, 기타로 연주하는 음악은 향수를 불러 일으킵니다.

2000년, ‘이태리의 오스카’라고 불리우는 ‘다비드 디 도나텔로’상을 9개나 휩쓸었습니다. 왠지 베니스에 가면 새로운 사랑이 기다릴 것 같습니다.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냐구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베니스에서 사랑에 빠지다. 두근거리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