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속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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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웅(자유기고가/글렌뷰)

우리가 자주 쓰는 말은 아니지만, 하심(下心)이란 단어가 있다. 이 단어의 의미는,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마음이라 설명을 하고 있다. 이것은 불교에서 나온 말이지만, 어느 종교나 이와 비슷한 말은 얼마든지 있다. 다만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행하지 않기에 모르는 것 뿐이다. 세상이 점점 이상해져 가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종교인들의 생활상이다. 종교에서 가르치는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을 찾기란 그리 쉽지가 않다. 종교를 갖는다는 것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그 중에 하나인데 말이다.
한국 방송공사에서 심혈을 기우려서 만든 TV다큐멘타리 중에 차마고도라는게 있다.
이 차마고도(茶馬古道, Ancient Tea Route)라는 것은 아주 오래된 무역로 정도로 알고들 있다. 티베트 인들이 만든 무역로이며, 유럽까지 연결이 되었다고들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증거가 없다고 한다. 문제는 척박한 곳에서 사는 사람들인데, 오체투지(五體投地) 라는 걸 한다. 몸의 다섯 곳이 땅에 닿도록 엎드려서 부처나 상대방의 발을 받드는 접족례(接足禮)에서 유래가 되었다 한다. 즉 머리, 팔, 가슴. 배, 다리 오체가 엎드렸을 때 땅에 닿아야 한다. 이 행위는 몸을 낮추어서 교만과 거만을 떨처버리려는 노력으로 본단다.
티베트 ( Tibet ) 는 중앙아시아에 위치해 있으며, 평균 고도가 백두산 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 나라이다. 지금은 중국에 속한 티베트자치구라 부르고 있다. 인도의 불교가 티베트로 와서 새로운 방법으로 티베트 종교가 된것이다. 티베트는 국민 교육수준이나, 경제적인 수준이 엄청나게 열악한 곳이다. 그런데도 오체투지하는 사람들에게 왜 이 어려운 걸 하느냐고 물으면,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과 생명을 가진 만물이 평화롭기를 바라기에 기도를 합니다.” 라는 대답들을 서슴없이 한다는 것이다. 세상 어느 종교도 이와 같은 대답을 하는 종교는 없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상을 보면 딱하기 그지 없다.
1958년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해서 8만7천명을 살해 할 때, 소를 타고 인도로 망명을 한 사람이 티베트의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 이다. 이 사람의 탄생비화도 예수와 비슷하다. 1935년 티베트 북동부에 위치한 작은 마을의 한 외양간에서 태어났다. 이 때 하늘에서는 무지개가 떳다고 했다. 예수가 마구간에서 태어났다고 하듯이 말이다.
인간에게 종교의 의미는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닌다. 인간이 종교를 이용해서 좋은 쪽으로 가는 것도 있지만, 나쁜 쪽으로 유도를 하는 사이비들이 있기에 종교의 다양한 기능이 왜곡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종교의 비과학적인 특성으로 인하여 의구심이 생기는 것은 사실이다. 인간이 갖고 있는 이성은 문명과 사회를 이룩해 왔고, 이러한 가치 창조로 인하여 발전되어 온것은 무시 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인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또한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도 있다. 이런 것으로 인하여 인간은 종교를 희구 (希求)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과학문명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을 한다 해도 종교가 인간들 옆에 꼭 있어야 하는지의 대답은 각자가 해야 한다. 과학이 밝혀 내지 못하는 부분이 아직도 많이 있다. 개인의 운명을 종교에 의탁하는 것은, 인간의 운명과 한계를 인정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 속에서 갖게 되는 행복이 노년들에게 좋게 인식이 되었으면 한다. 그나마 바른 종교 속에서 찾는 행복이 크기에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