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가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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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국 목사(횃불트리니티 총장 어시스턴트/횃불재단 DMIN 스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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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부부가 가인과 아벨을 낳은 후에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께 제사를 지낸다. 가인은 땅의 소산을 드리고 아벨은 양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다. 여기에 두 가지 종류의 제물이 있다. 하나는 땅의 소산이요, 또 하나는 양의 첫 새끼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았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았다. 왜? 혹자는 아벨의 제사는 피 흘림의 제사이지만 가인의 제사는 피 흘림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원래 하나님이 가인과 아벨 모두에게 동물로 제사를 지내라고 명했는데, 가인이 불순종하고 곡물로 제사를 지냈다고 추정한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레위기 2장에는 소제가 나온다. 이 제사는 곡물로 드린다. 곡물로도 제사가 가능하다. 물론 소제는 보통 동물 제사와 병행해서 드리지, 단독으로 드릴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창세기 4장의 경우, 하나님이 동물 제사를 지내라고 명했다는 단서를 찾기 힘들다.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은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단서는 창세기 4:7이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즉, 가인은 선을 행하지 않아서 하나님이 그의 제사를 받지 않았다. 무엇이 선한 행동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삶이다. 하나님께서는 제사 이전에 삶을 보신다고 성경은 일관성 있게 가르친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했다 (삼상 15:22). 하나님은 아모스 선지자의 입을 빌려 이스라엘을 꾸짖는다.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암 5:22). 이유가 무엇인가? 이스라엘 사회가 선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제사를 지내기 전에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암 5:24). 선한 삶을 살라는 말씀이다. 선한 삶 자체가 제사다.

제사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반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공의, 선하심, 자비, 인내, 성실, 등을 반사한다. 예배의 목적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뜻대로 삶을 사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예배와 삶은 불가분의 관계다. 신약의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신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 5:24). 따라서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은 이유는 그의 삶이 선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는 두 번째 단서는 창세기 4:3, 4에 있다. 아벨의 제사는 양이었는데, 단순한 양이 아니라, 양의 첫 새끼였다. 그러나 가인의 소산에는 “첫 소산”이라는 단서가 없다. 단순히 땅에서 난 것 가운데 아무렇게나 갖다 바쳤다고 할 수 있다. 아벨은 아무것이나 갖다 바치지 않았다. 많은 양의 새끼 가운데 첫 새끼를 구별해서 바쳤다. 성경에서 첫 번째 것은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좋은 것을 가리킨다. 또한 기름도 바쳤다고 했다. 현대인은 고기 지방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고대인에게 지방은 가장 값지고 소중한 부분이었다. 지금은 옥수수기름, 콩기름, 참기름, 들기름 등 여러 가지의 식물성 기름을 추출하지만, 옛날에는 사정이 다르다.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기름은 동물성 기름이다. 고대인에게 기름은 고기 중에서 가장 값지고 좋은 것이었다. 아벨은 이렇게 가장 귀한 것을 드렸다. 하지만, 가인의 예물에는 이것이 빠졌다. 그는 땅의 소산 중에서 아무것이나 갖다 바쳤다. 정성이 없는 형식적 제사였다.

정리하자면, 가인은 선한 삶을 살지 못했다. 그의 인생에 하나님이 없었다. 자기중심적 사람이었다. 마음에 의로움이 없었다. 그래서 삶도 선한 열매를 맺지 못했다. 삶이 선하지 못하니 예배도 실패했다. 형식적 예배를 드렸다. 삶과 예배는 구분할 수 없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