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감사의 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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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규 시카고한마음재림교회 목사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로부터 손님 환영하기를 좋아하는 민족입니다. 누군가 새로운 사람이 오면 관심이 많습니다. 알고 싶어하고 만나고 싶어하고 그리고 그 사람을 불러 대접하기를 즐겨합니다. 그 예로 옛날 조선시대에 손님을 대접하는 손님상을 차리던 문화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 집안에 큰 일이 있어 손님이 오면 융숭하게 향응을 대접하는 것이 예의였습니다. 이제 대접이 끝나고 손님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루에 내려서면 뜰방에 간소하게 차린 술상을 내는 것이 남도의 관행이었는데 이를 손을 쫓는다 해서 ‘쫓음상’이라 했지만 실은 손님을 보내기 아쉬워 잠시라도 더 붙들어 두고자 하는 우리 환대문화의 단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그런데 손님 접대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쫓음상을 받고 5리쯤 가면 오리정에 미리 사람을 보내어 술상을 또 차려내는데 이를 ‘마다리상’이라 했다고 합니다. 아마 지나친 환대가 과분하여 상 받는것을 마다하고 겸손해 하는 것이 예의로 되어있었기에 마다리상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한 재미있는 역사의 일화는 우리 민족이 얼마나 손님을 환대하는 민족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데요. 대원군 시절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강화도에 왔다가 전소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이 제너럴 셔먼호 소각사건을 응징하고자 강화도에 포진했던 미 극동함대 사령관에게 당시 강화유수가 다음과 같이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아국은 타국을 괴롭힌 일이 없는데 타국이 아국을 괴롭힘은 무슨 도리인가?” 이렇게 말하면서 그 선전포고문 끝을 이런 말로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만리풍파에 시달려 시장할 테니 약소하나마 거세한 황소 세 마리와 닭 50마리, 그리고 달걀 1만개를 보내노라” 이런 우호적인 선전포고문을 동서고금 어느 역사속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요. 아무리 전쟁을 하기 위해 왔다지만 손님은 손님이니, 대접은 해야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환대문화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거나 지인을 만나면 하는 인사가 있지 않습니까? “야! 오랜만이다 우리 언제 밥 한번 먹자!” 손님이 오면 손님상을 베풀어 밥 한끼를 대접해야 속이 편하고 사람도리 다 한 것 같은 마음이 드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목자되신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상(床)을 베푸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5) 여기서 상은 수여되는 상(prize)이 아니라 식탁(table), 곧 밥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께서 양떼를 인도하여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다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는 막대기와 지팡이로 맹수들을 물리치시며 그 양을 보호하시더니 갑자기 그 원수들 앞에서 밥상을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자요 만왕의 왕되신 주님께서 우리들의 앞에 상을 베푸시고 우리로 더불어 함께 먹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왕과 겸상을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왕이 다스리던 왕정 시대에는 왕의 큰 은혜를 입은 사람만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왕은 식사할 때 그 어느 누구도 상을 마주대하고 겸상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왕후라 할 지라도 같은 방안에서 식사를 하기는 하나 왕은 방의 북편에 왕후는 동편에 따로 앉아 12찬의 식탁을 따로 받아 식사했으며 식사를 시중드는 시종들도 별도로 3명씩 따로 있었다고 기록에는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하늘 왕께서 우리에게 밥상을 베푸시고 우리와 함께 식사하자고 하십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준비한 풍성한 식탁에 사랑하는 가족들, 친지들 그리고 이웃들을 초청하실 때 우리 주님도 초청하시면 어떨까요? 우리 주님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와 식탁을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계 3:20) 지난 일 년 동안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고 돌보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추수감사절 만찬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