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개혁주의 신앙: 구원의 순서(성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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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국 목사(트리니티 신학대학원 논문심사위원)

 

선행은 하나님의 계시된 뜻과 일치되는 것을 행하는 것이며 동시에 선한 양심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선을 행할 수 있는 신자의 능력은 절대로 그들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고 오로지 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나온다. 부패한 죄인을 부르고 거듭나게 하는 것이 전적으로 성령의 능력인 것처럼 거룩하게 성화시켜주는 것 역시 성령의 전적인 역사이다. 선행은 성화가 외적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행도 역시 성령의 능력으로 됨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선행을 행하려면 계속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그러면 이제 부패한 인간의 마음은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선행은 나의 힘으로 할 수 없고 성령의 감화를 받아야만 행할 수 있다면, 내 힘으로 선행을 하려고 하지 말고 성령이 역사할 때까지 그냥 기다려야 하지 않는가? 성령이 내 마음을 감동해서 선행하게 할 때, 그때 가서 해야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그렇지 않다고 밝힌다. “그렇다고 해서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없으면 아무런 의무도 실천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오해하여 나태에 빠져서는 안 되며,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써 불일듯하게 해야 한다”(16장 3항). 성령의 감화가 없어서 선행을 행하고 싶은 욕구가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자신이 선행을 행하지 못한 책임을 성령 하나님에게 돌리며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이런 자세는 이 사람이 오히려 중생하지 못했음을 반증한다. 중생한 사람은 성령 충만하지 못한 것의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며 열심히 은혜의 방편, 즉 말씀, 기도, 성례를 통하여 성령 충만하도록 노력한다. 그 힘으로 선행을 한 후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이 선행은 나의 힘으로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한다.

선행은 단지 인간의 의무이기에 절대로 인간의 공로가 될 수 없다. 갑이 을에게 100달러 빌렸다. 그래서 갑이 을에게 100달러를 갚는 것은 그의 의무일 뿐이다. 빌린 돈을 갚으면서 마치 을에게 덤으로 뭔가를 주는 것처럼 자랑스러워하며 고개를 뻣뻣이 들 필요는 없다. 선행이 이와 같다. 선행은 모든 사람의 의무에 불과하다.

로마 가톨릭의 교리에 의하면, 부패한 인간 중 일부는 마땅히 해야 할 의무 이상의 것, 말하자면 공로를 행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로마 가톨릭의 볼티모어 교리문답 1,125항에는 “성모 마리아와 성자들의 초과하는 만족”이 언급된다. 이 초과 만족, 또는 과다 보속은 성인들이 살아 있는 동안 자신들의 구원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 획득해 놓은 선행을 가리킨다. 이것은 하늘나라 선행의 보물 창고에 쌓이게 되어 가톨릭 신자 중에서 구원의 공로가 모자란 사람이 필요한 대로 얻어 간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보다도 더 완전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아무리 탁월한 성인, 선지자, 그리고 사도라고 해도 죽는 순간까지 죄인임을 성경은 분명히 가르친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6장 4항에서 이렇게 정리한다. “순종을 통해서 이생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정도의 선행에 도달한 사람일지라도 의무 이상의 공을 세운다든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결코 행할 수가 없는데 이는 그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마저도 그들은 다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