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개혁주의 신앙: 구원의 순서(예정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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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국 목사/로뎀교회 담임

 

하나님의 예정과 사람의 자유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모순처럼 보인다. 칼빈주의라고 부르는 개혁주의의 신학은 하나님의 주권에서 출발하고, 아르미니안 주의는 사람의 책임–또는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르미니안 주의의 핵심으로 본다–에서 출발한다. 양쪽 다 한 쪽을 옹호하기 위해서 다른 쪽을 약하게 하거나, 곡해하거나, 심할 경우 아예 무시해 버린다. 둘 다 취하자니 인간의 머리로서는 이율배반을 해결할 길이 없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예정했다면 어떻게 자유가 있을 수 있고, 이런 예정 가운데 있는 자유가 과연 자유라고 할 수 있는가? 어떻게 인간이 바둑판 위의 돌과 다를 수 있단 말인가? 반면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예정했다고 할 수 있는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 두 문제는 늘 제자리걸음처럼 보인다. 분명 인간의 머리로는 시원하게 풀 수 없는 한계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예정)과 인간의 책임 사이에 있는 불편한 관계는 시간의 존재론 때문이라고 본다. 우리는 시간을 초월할 수 없는 존재다. 시간의 흐름을 바꿀 수 없고 역행할 수도 없다. 정해진 시간의 법칙 안에서 시간에 구속되어 순간을 살아간다. 우리는 과거에서 미래로 살아가지 미래에서 과거로 거슬러 살지 못한다. 시간이라는 거대한 괴물을 이길 수 없다. 원인이 먼저고 결과가 나중이지 반대가 될 수 없다. 원인과 결과는 시간의 과거와 미래 속에서 움직인다. 이러한 제한 속에서 사람이 보편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예정의 개념을 이해해 보자.

우리도 무엇인가를 미리 정해 놓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도미노 게임을 생각해 보자. 도미노들을 자기가 원하는 모양으로 설정해 놓는다. 처음 도미노를 넘어뜨리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맨 마지막 도미노도 언젠가는 무너진다. 이 게임은 누군가의 계획(예정)에 의해 진행된다. 그런데 누군가는 과거에 미래의 일을 예정해 놓은 것이다. 사람에 의해 이미 세워진 도미노에는 사실 아무런 자유의지가 없다. 숙명처럼 각각의 미래는 과거에 이미 결정된 것이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보편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예정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과거에 미래의 일을 예정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원인과 결과의 순서를 초월하신다. 따라서 과거에 미래의 일을 작정하거나 예정하시지 않고 영원한 현재에서 예정하신다. 여기에 하나님의 존재 방식과 인간과 피조세계의 존재 방식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인간은 제한적 존재나 하나님은 초월적 존재이다. 예정은 하나님의 초월적 방식인데, 이것을 인간이 사는 사차원의 시공간, 원인과 결과의 흐름 속으로 가져와 인간의 제한된 언어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예정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생각할 수 없다. 우리에게 있어서 예정이란 미래에 무엇인가 할 것이라고 미리 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이해하는 예정의 의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과거가 아닌 영원한 현재에서 모든 일을 계획하신다(영원한 현재형 동사로서). 그러니까 인간은 시공간안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로 순차적으로 일을 하고 사건을 맡는다. 그 누구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박탈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