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개혁주의 신앙: 구원의 순서(예정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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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국 목사/로뎀교회 담임

사람의 영혼과 초월적 차원과의 관계를 살펴보자. 사람은 크게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신론자라고 하더라도 영혼의 존재를–비록 그들이 다른 용어, 이를테면, 정신, 생각, 마음, 기운으로 표현한다고 하더라도–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영혼은 분명 존재하나 육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뇌 속에 있는가? 심장 속에 있는가? 아니면 핏속에 있는가? 영혼이 존재하기 위해서 얼마만큼의 공간과 시간이 필요한가? 분명 영혼이 차지하는 시·공간의 값은 영(0)일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은 육체의 어느 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혼은 육체와 같이, 그리고 한 몸이 되어 존재한다. 영혼은 시·공간의 값이 필요하지 않은데도 존재하고, 시·공간의 값이 있는 육체와 함께 존재한다. 이런 면에서 분명 신비한 존재이다. 시·공간이 필요치 않은 초월적 차원의 존재가 시·공간으로 제한된 저차원에서 존재한다.

이제 당신은 죽음을 맞는다. 죽음으로 영혼과 육체는 분리된다. 육체는 여전히 4차원의 시·공간에 갇혀있다. 하지만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영혼 불멸을 믿는다. 그렇다면 영혼은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영혼은 본래 4차원의 시·공간이 필요하지 않은 존재라면 이제 영혼이 사는 원래의 차원에 거해야 한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을까? 여러 정황으로 볼 때 필자는 육체를 떠난 영혼은 초월적 차원에서 존재한다는 생각이 든다. 구원받은 자는 낙원 또는 셋째 하늘로, 구원을 거부한 자는 음부로 가는데, 이 둘(또는 두 곳)은 초월적 차원으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이곳들이 초월적 차원인 이유는 시·공간적으로 멀리 있기 때문이 아니라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육체를 떠난 영혼은 한없이 멀리 여행하지 않고 시·공간의 반대편에 서게 된다는 표현이 조금은 더 어울릴 것이다. 직선에 사는 존재가 평면에 사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또한 이 초월적 차원에서의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평면일 것이다. 이곳에서 영혼은 아마도 영원한 현재를 경험하지 않을까?

이제 하나님이 약속한 데로 예수님은 이 땅에 재림하신다. 산 자와 죽은 자 모두, 의인과 불의한 자 모두 부활한다. 초월적 차원에 있는 영혼은 썩지 않을 육체를 입는다. 그러면 이때 초월적 차원에 거한 영혼이 다시 4차원의 시·공간으로 들어와 저차원의 존재로 제한되는가? 필자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성경에 나타난 종말의 현상들을 살펴보면 마치 이 우주가 초월적 차원으로 변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필자의 직관이 맞는다면–물론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예수님 재림으로 인해 바뀐 세상은 4차원의 시·공간이 아닌 초월적 차원일 것이다. 믿는 자가 입게 될 영화스러운 몸, 즉 썩지 않을 몸은, 초월적 차원의 육체일 것이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의미는 직선과 같은 시간을 끝없이 사는 것이 아닌, 평면의 시간 내지는 입체의 시간 속에서 거하는 것이다. 이는 형이하학을 버리고 형이상학적 존재로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육체를 포함한 전 인격과 우주 질서가 초월적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더불어 필자는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신 우주는 4차원의 시·공간이 아닌 초월적 차원이었다는 심증이 든다–한편, 우주의 기원을 초월적 차원으로 본다면 일반 계시(이를테면 관찰과 경험에 의한 과학적 방법론)와 특별 계시 사이에 있는 불일치의 간격을 좁힐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인간의 죄로 인해 온 우주는 초월적 차원을 빼앗겨 생로병사와 죽음이 있는 4차원 시·공간에 갇혀버린 것 같다. 필자의 직관이 맞는다면 재창조는 온 우주가 다시 초월적 차원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영원한 현재라는 시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에 관한 이해에 조금은 더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현재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예정)과 사람의 책임 사이에 있는 모순 같은 것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끝으로 이상에서 언급한 모든 내용은 신학자들의 보편적 주장이 아닌 필자만의 직관임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