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개혁주의 신앙: 구원의 순서(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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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국 목사(트리니티 신학대학원 논문심사위원)

칭의는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의로운 자가 의롭다고 여김을 받지 않고, 본질적으로 악하지만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다는 뜻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어떻게 악한 자가 의롭다고 칭함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에게 발생한 사건을 살펴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의인이지만 죄인이라고 칭함을 받는다. 예수님은 죄가 없다. 아니 본질적으로 죄가 있을 수 없다. 죄라는 것은 표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표준은 하나님의 뜻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는 것은 다 죄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예수님 자체가 기준이요 표준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논리적으로 봐도 죄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가리켜 죄인이라고 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았던 이유는 예수님이 죄인이 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결코 의인에게 내려지지 않는다. 오로지 죄인만이 받는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심판을 받았다는 것은 죄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죄가 없으신 분이 죄인이 될 수 있는가? 전가를 통해서이다.

레위기를 보면 제사를 지낼 때 제사 지내는 자가 동물의 머리에 안수한다. 이는 자신의 죄를 동물에게 전가하는 행위이다. 죄를 전가 받은 동물은 인간을 대신해서 심판을 받는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죄가 예수님에게 전가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이 되었다. 말하자면, 죄인처럼 된 것이다. 본질적으로 죄인이 아니지만, 인간의 죄가 전가되었기 때문에 죄인이 되었다. 반면 예수님의 의로움은 죄를 전가한 인간에게 역으로 전가된다. 죄를 주고 의를 받는다. 이것이 칭의이다.

칭의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첫째로 세상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의 의가 전가되지 않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1장 1항은, 하나님께서는 유효하게 부르신 자들을 또한 값없이 의롭다고 칭하신다고 가르친다. 구원의 순서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구원할 자를 예정 가운데 선택하시고, 시간이 되면 부른다. 이것을 소명이라고 한다. 부르신 자는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것을 중생이라고 한다. 중생 되면 회심하게 된다. 즉 회개하고 예수 믿는다. 이렇게 되면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다. 이것이 칭의 이다. 그러니까 칭의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고, 예수 믿어 회심한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둘째, 칭의는 본질적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고, 본질적으로는 여전히 부패하지만, 의롭다고 여기는 법정적 용어이다. 칭의는 성경적 용어라기보다는 신학적인 용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성경에 보면 의라는 단어가 여러 곳에 등장하는데, 이들이 모두 다 칭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때로는 구원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기도 하고, 성화를 나타내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칭의라는 것은 불의한 자가 의롭다고 선언되는 신학적이며 법정적 용어이다.

셋째, 칭의는 믿음이나 행위 어떤 순종 때문에 발생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발생한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순종과 속상을 죄인에게 돌리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그렇다면 믿음은 칭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

넷째, 믿음은 칭의의 방편이 된다. 믿음은 칭의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 칭의의 원인, 칭의의 이유는 그리스도의 순종과 속성을 죄인에게 돌리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런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의존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믿음인데, 바로 이 믿음을 통하여서 칭의가 전달된다. 믿음은 칭의의 통로이다.

다섯째, 칭의된 사람은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고, 반드시 성화의 단계로 나아간다. 칭의에서 의의 완성으로 나아간다. 법정인 의에서 본질적인 의로 나아간다. 이점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장 2항에서 가르친다. “이같이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존하면서 믿음은 칭의의 유일한 방편이다. 그렇지만 믿음은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 안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모든 다른 구원의 은사들을 수반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