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개혁주의 신앙: 구원의 의미(생명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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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국 목사/로뎀교회 담임

 

구원받은 자는 육체의 죽음과 함께 영혼은 낙원(천당 또는 셋째 하늘)에서 즐거움을 누리고 육체는 흙으로 돌아간 후 부활을 기다린다. 유기된 자(구원을 포기한 자)는 육체의 죽음과 함께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음부에서 고통 당하며(눅 16:23) 부활을 기다린다. 이 기간, 즉 육체의 죽음에서 부활 때까지를 중간 상태(intermediate state)라고 한다. 구원받은 자는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전적 부패함으로부터 완전히 치유되어, 불순종의 모습으로부터 완전히 치유되어, 자기중심으로부터 해방되어,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 생명으로 부활한다. 생명의 부활은 완전한 영혼과 함께 영광스러운 육체로의 부활을 의미한다. 영혼은 썩어질 육체에서 벗어나는 순간 거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육체는 썩어서 흙으로 돌아갔기에 아직 거룩에 도달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재림하시어 육체가 부활하여 영혼과 만나면 이때 육체가 거룩해진다.

세상 사람은 일반적으로 생로병사를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섭리요 순리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서에는 없었다. 피조물의 중심인 인간이 하나님을 버리고 도망치자 온 피조 세계가 뒤틀려 버렸다. 생로병사는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 임했다. 그러므로 생로병사는 절대 아름답지 않고 험악한 것이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속(구원)의 큰 그림은 온 피조세계의 회복이다. 물론 인간이 피조세계의 머리이므로 이 그림에서의 중심은 인간의 구원이다.

사람은 원래 지정의를 포함한 육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게 창조되었다. 그런데 죄로 인하여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지 못한다. 인간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 육체는 아프고 병들며 죽고 썩으며 악취가 난다. 이것은 고통인데, 고통도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육체가 회복되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부활이 필연적이다.

어떤 이는 “부활이 과연 필요한가? 사람이 죽은 후에 육체는 단순히 사라지고 영혼만 천당에 가서 영원토록 살면 안 되는가?”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육체와 함께 지었기 때문에, 육체가 사라진 인간은 반쪽짜리 인간으로서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모습이 아니다. 구속이란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대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의 부활은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한편, 생명으로 부활한 사람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같으면서도 다른 몸이다. 같은 본질과 신분(identity)이지만, 그 능력과 특성은 다를 것이다. 이에 대한 적절한 예로 예수님의 부활을 들 수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평소에 예수님과 같이 생활했던 제자들조차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나중에야 알아보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예전과는 다르면서도 같은 분이었기 때문이다. 죽기 전과 닮았지만, 그의 능력과 특성이 달랐기에 알아차릴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자가 부활하면 죽기 전의 모습과 닮은 모습이겠지만 특성과 능력에서는 확연히 차이가 있을 것이다. 더 아프지도 않고 상하지도 않으며 고통도 없고 죽지도 않으며 썩지도 않을 영광스러운 육체를 얻게 될 것이다. 이 부분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현세에 사는 인간은 칼에 찔리면 세포가 파괴되고 조직이 파괴되며 피가 나오고 심한 고통을 느끼며 심하면 죽는다. 하지만 부활한 육체에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영화 터미네이터 2에 나오는 액체 인간처럼 칼에 찔려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부활한 몸이 액체 인간이라는 뜻은 아니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세에 적용되는 물리법칙과 차원이 바뀐다는 것 외에는 달리 생각할 수 없다. 중력의 법칙을 포함한, 원자와 원자, 분자와 분자 간의 모든 법칙이 달리 적용되고 4차원의 시공간이 아닌 초월적 차원으로 바뀐다고 봐야 한다. 환원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것이 뒤틀려버렸다. 그것은 미시적 세계의 원자, 전자, 양성자, 중성자의 법칙으로부터 거시적인 세계인 우주와 4차원의 시공간까지, 모든 곳에서 타락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한 생물의 죽음은 이 모든 세계와 서로 상호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어떤 생물의 죽음도 죽음 그 자체만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고 영생도 영생만을 독립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 생로병사는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세계와의 상호 작용 속에서 발생함으로, 구원받은 자의 영생도 역시 온 피조세계의 회복이라는 큰 틀 속에서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