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개혁주의 신앙: 선행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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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국 목사(횃불트리니티 총장 어시스턴트/횃불재단 DMIN 스태프)

선행은 모든 인간의 의무다. 월급을 받는 사람이 받는 만큼 일을 하는 것이 의무인 것처럼, 선행은 인간의 의무다. 선행은 어떤 형태로든지 공로가 될 수 없다. 또한 선행을 행함으로 우리의 죄가 사해진다거나 영생을 얻지 못한다. 이유는 인간이 구원받아 누리게 될 그 영광과 인간의 선행과의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돈으로 환산해서 이 두 사이를 비교해 보면, 우리가 구원받아 누리게 될 영광이 몇천 조라고 가정하면, 우리의 선행은 0.0000001도 안 된다. 사실 우리의 선행으로는 우리가 전에 범한 죄의 빚조차도 다 갚을 수도 없다. 가령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다만 우리의 의무를 행한 것뿐이요, 우리는 무익한 종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행한 어떤 선행도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죄로 오염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거듭난 어느 신실한 기독교인이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하여 많은 금액을 기부했다고 하자.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자세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자세로 구제했다. 그러나 이 사람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부패한 부분이 자리 잡고 있다. 어떤 인간적인 명예, 교만, 우월감, 또는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자기도 모르게 자기 마음속 한구석에서 다소 있다. 물론 이 사람이 거듭난 사람이라면, 이런 마음이 들지 않도록 성령에 의해 거듭난 영으로 계속해서 통제를 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부패한 마음이 동시에 역사한다. 따라서, 이 땅에서 거룩하게 성화 되는 기독교인의 모든 선행은 자신의 연약성과 불완전성으로 더럽혀져 있다.

그러나 참 성도가 행하는 선행이 비록 죄로 부패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불완전한 선행을 용납해 주신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예수님 안에 있는 완전함을 우리에게 주고 우리의 불완전함을 예수님에게 넘겨서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심판을 당함으로 우리의 부패와 불완전과 죄를 속량하셨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행위가 연약성과 불완전성을 수반하고 있을지라도 성실하게 행한 것에 대해서는 용납하고 상 주기를 기뻐하신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의 행위는, 가령 그 자체로서는 하나님이 명한 것이요, 그들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선하고 유익한 것일지라도 선행이 아니다. 그 이유는, 첫째, 믿음으로 청결한 마음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은 자신의 부패함을 보고 하나님께 겸손히 엎드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인데, 이들은 그런 마음이 아니라 자기의 부패한 힘으로, 자기중심으로 산다. 이런 자세로 선행을 하므로 선하지 않다. 둘째, 말씀을 좇아서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자세로 하지 않는다. 셋째,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생하지 못한 자의 선행은 창조주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부패한 인간의 마음은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 아무리 선행을 해도 선행이 되지 않는다면, 굳이 이를 행할 필요가 있는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그렇지 않다고 가르친다 (16장 7항).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 선행을 게을리하면 이는 더욱 죄를 저지르는 것이고, 하나님을 더욱 불쾌하게 하는 것이다. 즉 질적인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투명한 유리컵에 100% 순수한 물이 가득 있다. 여기에 독을 한 방울 떨어뜨리면 어떻게 되는가? 독이 물 전체에 퍼진다. 물에 독이 들어 있기 때문에 물은 오염된다. 이 물을 마시면 죽는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 이와 같다. 하지만 이 물에 있는 독이 계속 번식해서 이 유리잔에는 이제 100% 독만 있다고 가정해 보자. 예수 믿지 않고 선행을 행하지 않는 사람이 이와 같다. 예수 안 믿고 선행을 행하는 사람은 독이 한 방울 떨어진 물이요, 예수 안 믿고 선행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100% 독으로 가득한 잔과 같다. 하지만, 예수 믿고 선행을 행하는 사람은 해독제가 투여된 물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