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개혁주의 신앙: 유효한 부르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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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국 목사(트리니티 신학대학원 논문심사위원)

어머니 뱃속에서 죽은 아이나 유아기에 죽은 아이는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 이를테면 아이큐가 너무 낮아서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나? 일반적으로 구원 받기 위해서는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예수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특별계시인 언어로 된 성경 말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여긴다. 그렇다면 유아기에 죽은 사람이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의 경우는, 언어로 된 성경 말씀을 이해할 수 없기에,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일 수 없고, 결국 구원받지 못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런데 이런 결론은 매우 불편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어린아이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은 모두 다 자동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혹자는 예수 믿는 믿음이 아닌 다른 기준을 이들에게 적용할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구원의 기준이 사람마다 또는 세대마다 다를 수밖에 없게 된다. 말하자면 구약시대의 유대인을 구원하는 방법, 구약시대의 이방인을 구원하는 방법, 신약시대에서 한 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을 구원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실제로 이렇게 주장하는 교파가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하나의 구원의 기준을 제시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과 이를 실행하는 성령의 중생 행위이다. 개혁주의 신앙은 구원에 관한 모든 공로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만 돌린다. 그런 의미에서, 유아로 죽은 사람이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도 하나님이 선택하고 거듭나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받는다. 언어를 통한 성경 말씀이 전달되지 않더라도 말이다. 이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0장 3항에서 설명한다. “영아기에 죽은 택함을 받은 영아들은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중생하고 구원받는다. 성령께서는 그가 기뻐하시는 때와 장소와 방법을 따라 역사하신다. 또한 말씀의 전도에 의하여 외적으로 부르심을 받을 능력이 없는 다른 모든 택함 받는 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선택하고 중생한 사람 대부분은 성경 말씀을 전달받게 되어 있다. 이것이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영적 무능력 때문이 아니라 선천적 무능력으로 인하여 말씀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언어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율법이 전달된다. 언어는 실체가 아니다. 실체는 하나님의 생각(idea)이다. 언어는 하나님의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가 아닌 다른 방법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생각은 전달될 수 있다.

이런 사례에 해당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지 또는 얼마나 적을지 신앙고백은 억측하려고 하지 않고 다만 “택함 받은 영아들” 또는 “모든 택함을 받은 자”라고 한정한다. 여기에서 개혁주의 또는 칼빈주의가 얼마나 은혜로운 진리를 잘 설명하는지 알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칼빈주의의 예정과 전적 무능력 교리를 듣고서 소름 끼쳐 한다. 아르미니우스 주의 구원 교리가 칼빈주의의 구원 교리보다 더 좋아 보인다. 아르미니우스 주의는 만인이 자기가 원하면 구원받을 수 있고, 자기의 행위에 의하여 실제로 받게 된다고 주장한다. 반면 칼빈주의는 인간이 무능력하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받은 사람들만이 구원받는다고 가르친다. 이런 이유로 칼빈주의 구원 교리를 소름 끼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그 반대이다. 왜냐하면, 아르미니우스 주의는 약하고 무력한 자의 구원을 배제하고, 강하고 능력 있는 자에게만 허락하기 때문이다. 영아기에 죽은 영아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로 결단할 수 있겠는가?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는 사람은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데 어떻게 자신의 의지로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겠는가? 구원을 얻는데 필요한 것을 자신의 힘으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르미니우스 주의가 매우 달콤하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영적 무능력을 인정하는 사람은 아르미니우스 주의로 아무런 위로도 받지 못한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이런 사람에게도 구원의 소망이 있다고 가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