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개혁주의 신앙: 하나님의 계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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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국 목사(트리니티 신학대학원 논문심사위원)

성경은 명료하고 명백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로 해석해서 사람들에게 알려줄 중보자는 필요하지 않다. 물론 말씀에 대한 전문가는 필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어로 말씀을 하시기 때문에 인간이 이것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독할 중보자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이런 주장은 사탄이 만들어 낸 기발한 거짓말이다. 창세기 2:17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라고 하나님은 명백히 말씀하셨다. 그런데 뱀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말씀을 가지고 중 보한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세기 3:4). 이때 인간은 하나님의 명백한 말씀을 들으면 되는데, 그렇지 않고 말씀 해석자의 말을 듣는다. 여기에서부터 인간의 비극이 시작된다. 개혁주의에서는 성경 자체를 최종적 권위로 보지 그 해석이나 해석자를 성경위의 권위로 보지 않는다. 이점이 바로 로마가톨릭과 다른 점이다. 로마가톨릭의 볼티모어 요리 문답 1,328문에는 이런 질문이 있다. “성경에 담겨 있는 교리들의 참된 의미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답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교리들을 설명할 수 있는 권세를 받았고, 성령의 특별하신 도움을 받아 오류 없이 가르칠 수 있도록 보호를 받는 가톨릭교회에서…우리는 그것들의 참된 의미를 알 수가 있다”이다. 그러기에 로마가톨릭 교회는 하나님이 성경에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주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당신이 의미하는 것을 명백하게 밝혀 놓지 않으셨다고 가르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교회의 권위 있는 해석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마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이 의미하는 것을 감정하는 위치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앙은 정반대로 가르친다. 즉 성경만이 하나님의 진리로 완전히 명료하며, 교회가 내리는 해석은 성경 보다는 하위의 것으로 간주한다. 교회의 권위는 성경에 의하여 결정되지 성경의 권위가 교회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이렇게 성경은 명백하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은 그 자체가 한결같이 명백하거나, 모든 사람에게 한결같이 분명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7). 베드로후서 3:16을 보자.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사도 바울이 쓴 여러 서신서의 내용에는 이해하기 매우 힘든 것들이 있다. 성경에서 이해하기 힘든 것은 모른다고 인정하면 된다. 그것을 억지로 풀려다가 이단 삼단으로 빠진다. 베드로는 바로 이점을 경고한다.

요한복음 6:60을 보면 예수님의 설교를 다 들은 제자들의 반응이 나온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요한복음 16:17도 보자.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뇨 하고.”

어떤 설교가들은 “예수님의 설교는 아주 쉬웠다. 세 살짜리 아이도 다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교를 쉽게 하셨다”고 주장하는데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예수님의 설교는 매우 어려웠다. 대부분 유대인은 이해하지 못했다. 게다가 예수님 설교에 은혜받은 사람도 많지 않았다. 예수님의 설교는 대부분 유대인을 분노하게 했다. 어쨌든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 어려운 부분이 있다. 명백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사실 성경 그 자체는 한결같이 명백하다. 그런데도 명백하게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는 이유는 인간 능력의 한계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이나 성경에 그 책임이 있지 않고 순전히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 예를 들어서 아인슈타인이 살아와서 상대성 이론에 관해 설명한다고 가정해 보자. 아인슈타인은 분명 명백하고 명료하게 설명을 잘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듣는 사람들은 명백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이는 아인슈타인이 설명을 잘 못 했기 때문이 아니라 듣는 사람들의 이해력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모든 부분을 명백히 말씀하시지만, 사람들의 이해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명백하지 않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