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개혁주의 신앙: 하나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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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국 목사(트리니티 신학대학원 논문심사위원)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지만, 세분의 독립된 신격이 계신다. 이 세 분의 격은 하나님의 부분을 각각 차지하지 않고 그 하나님이시다. 수학으로 설명하자면 1 + 1 + 1 = 1된다. 성부, 성자, 성령은 각각 독립된 위격을 갖지만, 하나님을 이루는 부분은 아니다. 즉 이 세 분이 합해서 한 하나님이 되지 않는다. 이 하나님 각각이 동등한 그 하나님이 된다. 한 분이 세 분이고 세 분이 한 분이다. 이를 가리켜 삼위일체라고 한다.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이 교리는 유대인들과 이슬람 교도에게 크나큰 거침돌이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유일신을 믿지 않고 여러 신을 믿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의 언어를 통해 주어지지 않고, 성경의 행위를 통해서 주어졌다. 모든 계시나 교훈을 반드시 언어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 행위를 통하여 주어질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 성경은 많은 곳에서 이렇게 행위나 사건을 통하여 계시를 주신다. 만약 하나님이 창세기에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자신을 계시했다면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낼 때 단어의 정의를 통해서 보다는 사건과 행위를 통하여 밝히셨다. 예를 들어 창세기 1:26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할 때 자신에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으로…” 창세기 11:5-7을 보면 인간들이 바벨탑을 만들었을 때, 하나님이 하늘에서 보시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내려가자.” 즉, 자신을 가리킬 때 복수를 사용하셨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탄생과 공생애의 사건을 통해서 성자 하나님을 보여주셨고,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서 성령 하나님을 보여주셨다.

또한 하나님은 점진적 계시를 통해 삼위일체를 나타내셨다. 구약에서는 조금 나타내셨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금씩 더 많이 계시하셨기에 신약에서 하나님의 존재 방식은 구약보다 더욱 명확히 나타난다.

삼위일체를 가장 종합적으로 잘 설명해 주는 부분이 마태복음 28:19이다. 이곳을 보시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분명 세 명으로서 복수이지만, 이름들이 아닌 이름이라고 단수를 쓴 것에 주목해야 한다. 한 이름 안에 세 분이 있다. 영어로는 “in the name of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Spirit”이다. 문법적으로 따지면 모순처럼 보이는 이 구절이 삼위일체의 성격을 잘 설명한다. 만약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동일한 한 실체를 소유하지 않았다면 저자 마태는 분명 “이름들”이라는 복수를 써야 했다. 만약 그 한 실체가 세 위격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마태는 성부, 성자, 성령 대신에 그냥 하나님이라고 써야 했다.

사도 요한도 요한 일서 5:8에서, “증거하는 이사 셋이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 계시니,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고 했다. 여기에서 말씀은 성자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분명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모순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삼위일체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하기 위한 여러 시도가 있었다. 어떤 사람은 삼위일체를 역할론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한 연극배우가 여러 개의 역할을 하듯이 삼위일체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한 남자가 집에서는 아버지요, 학교에서는 선생이요, 교회에서는 장로인 것처럼, 하나님도 한 하나님인데 여러 개의 탈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역할론이라고 하는데, 성경적이지 않다. 마태복음 3:16, 17을 보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성부의 음성이 들리고, 성자가 세례를 받았으며, 동시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왔다. 만약 역할론이 맞는다면, 동시에 세 분이 있어서는 안 된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