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그들로 숨쉬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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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환 목사(시카고기쁨의 교회 담임)

그들로 숨 쉬게 하라

태초에 숨이 있었다. 온 세상을 태어나게 한 숨이었고 살아있게 만든 숨이었다. 인간이 빚어지던 날도 숨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코에 불어넣은 숨으로 인간은 비로소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 이 숨이 코끝에서 사라지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산 존재가 아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본 마른 뼈들이 이리저리 연결되고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피부가 덮여도 아직은 아니었다. 사방에서 생기(숨)이 불어와 그들에게 들어가자 비로소 그들이 ‘살아나서’ 일어선다.

우리말로 생명을 ‘목숨’이라고 한다. 숨을 쉬는 통로가 목이기 때문에 목숨이라 부르게 된 듯하다. 이 목숨의 근원은 하나님이다. 들숨과 날숨 속에 하나님의 숨결이 있다. 하여, 누군가의 숨을 빼앗는 일은 하나님의 숨을 빼앗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의 숨통을 막는 일은 하나님의 숨통을 막는 일이다. 가인의 아벨 살인은 인간이 하나님의 숨을 빼앗은 최초의 사건이었다. 이후 인류의 역사는 누군가로 하여금 제대로 숨 쉬지 못하게 하는 죄악으로 점철되어 왔다.

8분 46초. 백인 경찰 데릭 쇼빈(Derrick Shauvin)이 조지 플로이드의 목을 무릎으로 짓누르다가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한 시간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한 사람의 목을 무릎으로 짓눌러 숨을 틀어막은 이 악행은 하나님의 목을 조른 것과 다르지 않다. 조지 플로이드의 마지막 그 말이 하나님의 신음소리로 들리는 이유다. “I can’t breathe(숨을 쉴 수가 없다).”

운명의 장난일까,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우리 모두가 수개 월 간 싸우고 있는 코로나19의 가장 심각하고 뚜렷한 증상이 바로 호흡 곤란이다. 탁월한 작가이자 교육가인 파커 팔머는 조지 플로이드 사건이 일어난 직후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겼다. “‘숨을 쉴 수 없다’는 말은 미국에서 COVID-19으로 죽어간 10만 명의 희생자들이 인튜베이트 하기 전에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만일 우리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이념보다 과학을, 돈과 권력보다 인간의 생명을, 자신들의 이익보다 공공의 이익을 더 가치있게 여겼다면 더 적은 사람들이 죽었을 것이다. 결국 그들의 무릎으로 희생자들의 목을 짓누른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나누어 주신 그분의 숨을 자유롭게 쉬지 못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으려 숨이 차도록 일해야 하고, 남자의 차별에 여자가 숨이 막히고, 인종차별로 흑인이 숨을 쉴 수 없고, 강대국이 약소국의 숨통을 틀어막고, 인간이 환경오염으로 자연의 숨을 빼앗아가 버렸다. 숨을 쉴 수 없다는 신음과 부르짖음이 도처에서 들린다. 파커 팔머가 지적하듯, 우리가 길을 가다가 누가 숨을 쉴 수 없다고 호소하는 걸 듣는다면 뭐라도 하지 않겠는가. 심폐소생술을 하든지, 911을 부르던지.

그렇다. 뭐라도 해야 한다. 그들로 숨 쉬게 해야 한다. 그냥 지나친다면 그 사람이 잃어버린 숨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서 나와 당신에게 물으실 것이다. 400년 간 백인우월주의에 의해 제 숨을 쉬지 못하고 살아온 아프리카계 미국인들로 숨 쉬게 하라. 신분 문제로 오늘도 숨죽여 살 수 밖에 없는 이들로 숨 쉬게 하라. 이번 약탈로 답답한 한숨을 쉬고 있는 한인들로 숨 쉬게 하라. 강자에게 짓눌려 숨막힌 약자가 있다면 숨 쉬게 하라. 그대 코끝에 아직 숨이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