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나그네에게 절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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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용 목사(시카고기쁨의교회)

 

미국에 유명한 유대인 랍비였던 하페즈 하임은 어느날 뉴욕의 집에 한 여행객이 찾아와 함께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 여행객은 유명한 유대인 랍비의 집이니 대단한 것들이 있을 줄 알았는데, 방은 하나뿐이고 거실에는 의자 두개와 책상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사방의 벽에는 책들만 가득했다. 그래서 여행객은 하페즈 하임에게 물었다. “랍비여, 나머지 가구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자 하페즈는 거꾸로 여행객에게 물었다. “당신의 가구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질문에 여행객은 웃으면서, “저는 여행객입니다. 가구는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랍비 하페즈는 이렇게 답했다. “나도 이 땅에 여행 온 나그네일 뿐입니다.”

우리는 나그네이다. 이 땅에 잠시 여행을 온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들이다. 여행객은 자신의 여정 가운데 힘들고 괴로워도 절대로 그 역경을 절망과 좌절로 치부하지 않는다. 장애를 만났을 때, 잠시 쉬어가거나 전에 있던 곳으로 되돌아 가 다시 새로운 길을 찾아 가는 것은 몰라도, 어려움과 고난을 겪었으니 여기서 여행을 멈춰야겠다고 말하는 여행객은 거의 없다. 나그네는 마지막 여행의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그곳을 소망하고 기대하며 묵묵히 자신의 여정을 걸어갈 뿐이다. 중간에 허무하고 공허하게 느껴질 순간과 시간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나그네 여정 속에 무의미하고 가치 없는 걸음과 장소는 없다. 나그네가 스쳐 가는 모든 곳은 의미가 새겨지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사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공허와 허무를 경험하는 순간 여행을 멈추고 절망에 빠져든다. 나그네인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올 때까지 힘들고 어려운 여정일지라도 그 길을 걸어 고향에까지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최근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에게만 주어진 여행을 포기한다. 여행 중간에 주저 앉아 그곳을 고향삼아 살아가기도 한다. 우리가 묻힐 곳은 고향이고 만나야할 사람은 가족과 친구들인데, 자꾸 여행 중간에 쓰러지고 넘어져 순간을 즐기고 현재의 만족에 목적을 상실한다. 계속 걸어가야 하는 나그네가 발을 멈추고 스스로 호흡을 끊어 버린다. 그것은 곧 나그네의 생명력을 잃어 버리는 것이다. 여행객이 발길을 멈추는 것은 더 이상 살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멈추고 주저 앉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은 자가 좇아가는 곳을 가는 것이 아니라, 산 자들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는 곳으로 가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에 성경 마가복음에서는 우리 인생 마지막에 만나야 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막12”27)고 증거한다. 하나님이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뜻은 인생 여정을 걷는 우리는 생명력을 가지고 끊임없이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멈추거나 주저 않아, 우리 인생이 허무하고 공허한 것에 묶여 있는 모습을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 절망과 좌절의 구간이 우리의 여행 기간에 있을지라도, 절대로 죽은 자의 하나님과 같은 우상에 속아 그곳에 그림같은 집을 지어 놓고 그곳이 마치 자신의 고향처럼 생각하고 살겠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절대로 이 땅에는 부활의 소망과 생명의 기쁨을 맛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잠시 그런 만족과 유익을 줄지는 모르지만, 이곳은 절대로 영원한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의 신앙은 나그네의 삶이지, 한 번 태어나 한 번 죽는 인생이 절대 아니다. 영원을 꿈꾸며 이 땅에 삶의 여정을 진지하게 걸어가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How to live & How to die)를 어느 누구보다도 진지하고 깊이 있게 묵상하며 하루 하루 나그네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구별된 생을 꿈꾸게 될 것이다. 사순절기간이다. 구별되고 다른 삶은 살고자 한다면, 영원을 좇아가는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