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나의 아버지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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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관 노인건강센터사무장(시카고)

 

혼례를 치르고 황해도 신계라는 농촌으로 갔다. 장인 김상준 목사님의 전답과 임야를 맡아 농촌개간사업에 앞장섰다. 농사와 축산을 독려하고 뽕나무를 심어 부녀자들이 양잠업(養蠶業)으로 수익을 올릴 수 있도록 장려했다. 농촌에 활기가 일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저녁이면 마당에 모닥불을 피우고 둘러 앉아 ‘잘 살려면 배워야한다!’고 외치시면서 머슴살이에서 터득한 농사일과 일본서 보고 느낀 것을 소상히 얘기하고 격주로 열리는 시골 장에서  거래되는 농산물 가격조사를 해서 값이 나가는 것을 심고, 가축사육을 장려해서 소득증가에 박차를 가했다. 얼마 안가 가가호호 農牛와 탈곡기를 사들여 농사일을 보다 능률적으로 해 나가게 됐다. 5년이 지난 어느 날 어머니가 경성(서울)으로 가자는 제의를 했다.

어머니는 농촌생활이 싫었다. 개성 밋션 학교(Mission School)인 호수돈 여자중학교(5년제)에 다니셨고 성격도 활달하여 도시생활을 선호하셨기에 아버지(이후는 아버지로 기재)의 농사일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농사를 지어 소산을 장인어른께 바치는 것도 떠나자는 이유의 하나다. 아버지는 많이 고민하시다가 떠나기로 결심하고 평양 선교리에 살고 계시는 장인어른께 하직 인사차 평양을 방문했다. 때는 5월 初 농번기였다. 인사를 마치고 나오셔서 걷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山川이 너무나 아름답다. 모란봉을 뒤덮은 벚꽃이며, 대동강에서 뱃놀이하는 젊은이들…. 무능도원을 보는 듯 모두가 別天地다. 다리를 건너면서 사방을 둘러보시던 아버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동(awesomeness)에 정신을 잃고 주저앉으셨다. 순간 어디선가 “태수야….. 경성에 있는 승동교회로 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 하고 머리를 드니 조금 전에 보였던 모란봉이 한 눈에 들어온다. 승동교회를 찾아 가라는 소리가 마치 저 하늘나라에 계신 어머니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홀연히 들려온 하나님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한참 주저하다 정신 차려 다시 길에 올랐다. 걷기는 걷는데 어느 방향으로 걷는지 모르면서 발 가는대로 계속 걸었다.

기차편으로 경성에 도착! 승동교회를 찾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조선신학교가 설립되는 첫날이다. 김재준 목사님, 오건영 목사님, 김영철 장로님 몇 분이 시작하는 조선장로교 신학교가 탄생하는 날이다. 아버지는 이 분들과 얘기를 나누고 즉석에서 입학원서를 썼다. ‘번갯불에 콩 구어 먹는다’는 속담처럼 정신없이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김재준 목사님(학장)의 첫 강의를 듣고 향학열이 불같이 일어났다. 그날 저녁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여보, 하나님이 나를 경성으로 보내신 이유가 있으신 것 같소. 아이(큰 아들)를 데리고 이리로 올 준비를 해요. 이곳 환경도 좋고 교인들도 아주 친절하고 특히 김재준 목사님의 강의가 너무나 좋아서 하는 얘기요.” 한 달여 만에 어머니는 승동교회 사택으로 이사 오셨다. 가족이 모였다.  아버지는 전도사로 어머니는 주일학교 교장으로 일을 시작했다.

신학교에 들어가신 아버지는 매일이 새로웠다. “예수님을 버리면 망한다”고 유언하신 어머니 말씀이 양식이 되어 여기까지 왔지만, 지금 부터는 예수님을 배우는 신앙인으로서 또한 교회의 일원으로서 매일 어떻게 행동하고 살아야하는가를 깊이 터득할 수 있기 때문에 배움에 더욱 몰입되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일곱 번의 일흔 번씩 용서하시는 분이시기에 그 앞에는 의인도 죄인도 설 자리가 있다는 것, 40일 동안 광야에서 예수를 시험했던 마귀도 손들고 도망 갈 만큼 하나님의 능력은 절대적이라는 것을 몸소 체험하고, 마귀 들린 사람(정신병 환자?)들과 함께 숙식하면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하고 또 함께 웃기도 하면서 지냈다. 이 얘기가 주위에 전해지면서 하 목사는 마귀 내쫓는 능력(?)있는 목사로 알려졌다. 승동교회에서는 아예 방 하나를 따로 내어 이 사람들만을 위한 기도실로 정하고 하 목사님이 전적으로 책임을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