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나의 아버지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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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관 노인건강센터 사무장(시카고)

 

6.25 사변 때다. 찌는 듯 무더운 여름, 손수레를 끌고 130리 남쪽에 있는 시골 용인군 원삼면 문촌리라는 곳으로 피난 갔다. 이 곳은 아버지가 왜정 때 2년 동안 전도사로 일하셨던 곳이다. 한강철교가 폭파된 후인지라 말죽거리 쪽으로 돌아가야 했다.  강을 건너 도착한 곳이 비어있는 농가였다. 멍석을 깔고 모두 누었다. 어머니는 밥을 짓고 아버지는 짚과 겨를 모아 모깃불을 지폈다. 여름밤의 하늘, 가끔 들리는 포성, 이 와중에도 별들은 아름다웠고 가끔 스쳐가는 미풍은 정말 고마웠다.

잠에서 깨어 보니 옆에 아버지가 비스듬히 누어계셨다. 부채는 멍석위에 떨어져있고 머리는 수그리신 체 부동자세였다. “왜 안주무시고 그러세요?” 아버지의 어깨를 흔들었다. 아버지는 아직도 부채질을 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셨는지 놀란 듯 깨어 주위를 보시고는 “더 자지 왜 벌써 일어났냐?… 반문하셨다. 우리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둘러앉아 매일하는 18번 찬송 22장(구 찬송가) ‘지난밤에 보호하사 잠잘 자게 했으니….’를 부른 후 기도를 시작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한, 가족의 무사를 위한 눈물의 호소였다.

동이 텄다. 모두 손수레(구루마)를 끌기 시작했다. 누이동생 둘은 손수레에 태우고 주로 형님과 내가 끌었다. 찌는 듯 무더운 복더위라 자주 원두막을 찾아 참외와 수박으로 갈증을 해결하고 자주 휴식을 갖았다. 보풀라 나무로 꽉 채운 시골길, 고생을 하면서도 가족과 함께 먹고, 자고, 아픔을 같이 나누는 시간이었기에 고생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곱동고개 밑에 다다랐다. 이 고개를 넘어 문시랭이 까지가 십리다. 아주 옛날엔 이곳에 호랑이가 서식했고 여우들이 자주 나타난 곳이라 했다. 형님은 우리가 산 밑에서 기다리는 동안 문시랭이를 향해 떠났다. 등불도 훌랫쉬 light도 없이 오직 달빛을 벗 삼아 걸었다. 산을 내려 첫 번째 보이는 초가집에 들어가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다행이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교회 영수님의 집이었다. 아주 반가워하시면서 단숨에 교회 장정 서너 명을 모아 지개를 진체 산을 넘어 우리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이 영수님과 하태수 목사님의 만남! 울음소리도 아니고 통곡소리도 아닌 우정을 토해내는 동지의 함성 같았다. “기도드립시다!” 우리 모두 선체로 눈을 감았다. 아버지는 손을 모으시고 목멘 소리로 기도를 시작하셨다.

산을 넘어 내려오니 새벽 2시, 짐을 풀고 방에 들었다. 깨끗한 방바닥은 시원했다. 상의를 벗은 채로 누었다. 아버지 유전자를 받은 지라 모두 코를 심하게 골았다. 저음, 고음

plus 잠고대… 녹음해놓지 못한 것이 정말 유감이다.

예배당 종이 울렸다. 추우나 더우나 아프나 성하나 새벽 다섯 시가 되면 종은 울렸다. 십리 밖까지 울려 퍼지는 예배당 종소리는 온 동리의 시계가 되어 버렸다. 종소리에 일어난다. 소죽을 쑨다, 소를 몰고 20리 장(백암장)으로 향한다. 작은 농촌에 질서가 잡혔다.

예배당 주변엔 우물, 밤나무, 대추나무 그리고 향나무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향나무의 모습이 너무나 초라했다. 아버지는 손수 만드신 작은 망태기를 들고 향나무로 가서 바싹 마른 낙엽을 손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바짝 마른 향나무 잎은 가시여서 잘못하면 찔리기 일쑤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 손끝에서 피가 흐르고 있지 않은가…  “아버지, 피가 흐르는데요…” 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버지, 호미도 있고 미군들이 쓰다 버린 가죽장갑도 있는데 왜 그러세요!” 또 말했다. 균이 들어가면 파상풍이 될 수도 있는데… 걱정이 돼서다.  “예수님은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피를 많이 흘리셨는데…” 낮은 소리로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손끝의 피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아버지가 예수님이세요?” 말씀이 안 되는 것은 아예 입 밖에 내지 마시라는 뜻이었지만 아버지는 개의치 않으셨다.